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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첫 여행, ‘왕왕작작’ 서귀포 오일장에 잘 왔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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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향토오일시장 안의 수산물 파는 코너. 신선한 제주 해산물이 손님을 기다린다.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 안의 수산물 파는 코너. 신선한 제주 해산물이 손님을 기다린다. 최갑수 제공




2026년 1월1일 새벽, 눈을 떴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2025년 12월31일에서 그냥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뭘. 그냥 이렇게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54년을 살아온 내게 2026년 1월1일은 그저 2025년 12월31일의 다음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며 오늘 아침엔 뭘 먹을까 하고 고민했다. 달걀프라이를 만들까, 달걀찜을 할까. 냄비에는 어제 끓여둔 미역국이 있다. 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섬주섬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빵에 잼을 발라 우유와 함께 먹었다. 달걀찜을 만들기가 귀찮았다. 미역국은 다행히 상하지 않아 한번 더 끓였다. 그리고 카페에 가 노트북을 켰다. 일본어 회화, 일본 이자카야 여행 3회 가기. 5㎏ 감량. 에세이 한권 내기.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히. 나한테만 집중하기. 고집 앞세우지 말고 조언을 듣자. 그리고 차분하게 걷자. 메모 앱에서 지난해 1월1일 다짐을 찾아냈다. 이 중에서 이룬 건, ‘에세이 한권 내기’밖에 없구나. 일본어 학원은 서너달 다니다가 그만뒀고, 살은 더 쪘다. 나는 여전히 고집불통 아저씨고, 신중하지 못해 자주 일을 그르친다. 일본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허둥댔고 어수선한 한해였구나.



2026년엔 뭘 해볼까? 하지만 이젠 결심 같은 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은 결심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건 거창한 계획과 단호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실천이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건 독서가 아니라, 책을 읽는 습관이었다. 올해에는 그냥 많이 걷고, 좋은 음식을 먹고, 책을 읽고, 꾸준히 글을 쓰자. 그러다 보면 뭐라도 만들어져 있겠지. 그리고 지금 연재하고 있는 ‘비(B)급 여행’을 잘 마무리해서 책이라도 한권 내자. 아 참, 나는 여행작가니까 여행을 조금 더 열심히 다니자. 작년엔 너무 안 다녔다.



서귀포향토오일시장 풍경.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 풍경.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 안의 수산물 파는 코너. 신선한 제주 해산물이 손님을 기다린다.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 안의 수산물 파는 코너. 신선한 제주 해산물이 손님을 기다린다. 최갑수 제공


제주도로 훌쩍 날아왔다. 2026년 첫 여행. 여기는 서귀포다. 지난해 제주도에 관한 에세이를 만들다가(나는 출판 편집자기도 하다) 제주도에는 많은 시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기회가 되면 가보려고 몇몇 시장의 이름을 메모해뒀는데, 어제 웹서핑 중에 때마침 서귀포에 향토오일장이 열린다는 걸 알고는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이다. 삶의 냄새가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곳. 향토오일장이었다.



아, 오길 잘했다. 새해 첫 여행지로 오일장이라, 시장통에 첫발을 들이밀자 이 생각이 들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붉은 햇덩이를 보며 소원을 비는 것도 좋지만, 삶의 디테일들로 가득한 오일장을 구경하는 것도 뭔가 색다르고 재밌고 의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니 햇덩이 앞에서 빌 만한 커다란 소원도 없다. 세계평화, 남북통일도 포기한 지 오래다.



서귀포향토오일시장 들머리 풍경.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 들머리 풍경. 최갑수 제공


시장 입구부터 내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날아다녔다. 제주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이해해주시길. 서귀포향토오일시장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서는 장이다. 1974년 서홍동에서 처음 문을 열어 서귀포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던 오일장이, 1995년 지금 자리로 옮겨와 ‘향토오일시장’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장은 매월 4·9·14·19·24·29일, 닷새에 한번씩 열린다. 장날이 되면 동홍동 중산간도로 옆 넓은 주차장에 차가 가득 들어찬다. 전국 재래시장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의 주차장을 갖춘 시장이라고 한다.



도민과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서귀포향토오일장 풍경. 최갑수 제공

도민과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서귀포향토오일장 풍경. 최갑수 제공


시장을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에는 도민과 여행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민들은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고 여행자들은 어깨에 에코백을 멨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이거 얼마꽈?” “오늘 건 싱싱허우다, 맛 좀 봐라.” 여행자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제주 말은 고작 이 정도다. 서귀포향토오일시장은 품목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장터 안쪽으로 들어가면 수산물 코너, 어시장이다. 비릿하기보다는 신선한 바다 냄새가 먼저 코를 스친다. 스티로폼 박스와 스테인리스 수조 위에는 제주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들이 줄을 선다. 자리돔, 은갈치, 참조기, 고등어, 옥돔은 기본이고, 계절에 따라 갑오징어와 한치, 문어, 알배기 꽃게가 얼굴을 내민다. “오늘 물 좋수다!”를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엔 바다의 거친 파도를 견뎌낸 강인함이 묻어 있다.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무와 당근 등을 파는 할머니 상인들이 채소를 정리하고 있다. 최갑수 제공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무와 당근 등을 파는 할머니 상인들이 채소를 정리하고 있다. 최갑수 제공


어시장이 파도 같다면 채소전은 밭의 평온함을 품고 있다. 서귀포의 비옥한 화산토에서 자란 무와 당근, 양배추가 흙 묻은 채로 널려 있다. 산지에서 바로 내려온 채소들이라 잎이 탱탱하고 줄기에 힘이 있다. ‘할망장터’라 불리는 구역은 꼭 들러보시길. 할머니들이 직접 텃밭에서 키워 가져온 소박한 푸성귀들 앞에서는 흥정조차 사치다.



서귀포향토오일장에 있는 감귤 파는 코너.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장에 있는 감귤 파는 코너. 최갑수 제공


시장 한편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곳, 바로 감귤 코너다. 제철 맞은 감귤부터 한라봉, 천혜향까지. 껍질이 얇고 과즙이 꽉 찬 서귀포 감귤 하나를 입에 넣으면 새콤달콤한 제주 태양과 바람의 맛이 팡 터진다. 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수박, 멜론, 바나나, 참외, 사과, 유자, 체리까지 계절마다 다른 과일이 자리를 바꿔 앉는다.



추억의 냄새가 나는 시장 만물상 구역 풍경. 최갑수 제공

추억의 냄새가 나는 시장 만물상 구역 풍경. 최갑수 제공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 구역도 있다. 화려한 꽃무늬의 ‘몸뻬 바지’가 깃발처럼 펄럭이는 잡화 구역은 보물찾기하듯 뒤지는 맛이 있다.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투박한 농기구부터, 할머니들의 필수품인 덧신, 그리고 추억을 소환하는 양은 냄비까지. 세월의 때가 묻은 물건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갔던 그 옛날 장터의 냄새가 난다.



‘제주나대’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칼을 파는 대장간. 장날에는 제주섬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단골로 찾는 곳이다. 최갑수 제공

‘제주나대’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칼을 파는 대장간. 장날에는 제주섬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단골로 찾는 곳이다. 최갑수 제공


대장간도 있다. 앞에는 낫과 호미, 괭이, 톱 같은 농기구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제주나대’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칼이 눈에 띄었다. 칼과 낫의 중간쯤 되는 이 농기구는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잡풀을 제거할 때 꼭 필요하다고 한다. 장날이면 섬 구석구석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일부러 이 대장간을 찾아와 새 농기구를 맞추거나 무뎌진 날을 갈아 간다고 한다.



서귀포향토오일시장에서 파는 모과는 향이 근사하다. 최갑수 제공

서귀포향토오일시장에서 파는 모과는 향이 근사하다. 최갑수 제공


나는 지금 모과 향을 맡으며 글을 쓰고 있다. 서귀포 시장에서 사 온 것이다. 아저씨가 마당의 모과나무에서 딴 것이라며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었다. 문득 어릴 적 아버지의 스텔라 자동차 뒷유리 앞 공간에 놓여 있던 모과가 떠올라 사 왔다. 한알은 차 안에 두고, 또 한알은 거실에 두고, 또 한알은 작업실에 갖다 놓았다.



지난해 이맘때 나는 치앙마이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새벽 거리를 산책했고, 오전에는 테라스에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며 글을 썼다. 낮잠을 자기도 했다. 오후에는 오토바이 택시를 불러 뒷자리에 타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아무 식당에 들어가 쌀국수를 시켜 맥주를 마셨다. 노을 질 무렵이면 사원에 갔다. 마당 구석 벤치에 앉아 탑 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빛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그 노을 속으로 힘껏 날아오를 때가 있었는데, 그 날갯짓은 마치 초월을 향한 포즈처럼 보였다. 만약 이 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눈으로 쫓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무와 당근 등을 파는 코너. 최갑수 제공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무와 당근 등을 파는 코너. 최갑수 제공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당근. 최갑수 제공

제주 화산토에서 자란 당근. 최갑수 제공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변한 것 없지만, 또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아침저녁으로 같은 길을 걷는다. 저녁에는 파스타를 만들어 와인을 마시며 키스 재럿(미국 재즈 피아니스트)과 슈베르트를 듣는다.



1년을 더 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조금 덜 아프고, 삶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무언가에,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조금 더 몰두하고 있다. 쓰고 싶은 글, 갖고 싶은 차, 가고 싶은 여행지, 언젠가 살고 싶은 마을도 생겼다. 2025년에서 2026년으로 바뀐다고 극적으로 바뀌는 건 없지만, 모과 향이 공기 중으로 번져나가듯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괜찮아져간다. 새해 첫 여행으로 서귀포에 다녀오길 잘했다.





풍년식당의 국밥. 최갑수 제공

풍년식당의 국밥. 최갑수 제공


B급 음식



시장 구경의 절반은 먹는 재미다. 시장 골목 안쪽, 김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집이 있다. 서귀포향토오일시장 단골들이 그냥 ‘국밥집’이라 부르는 곳, ‘풍년식당’(064-733-8580)이다. 장날만 문을 여는 집이 아니라, 평일에도 아침 7시부터 국물을 끓인다. 이곳은 화려한 인테리어도, 특별한 홍보도 없지만 장날이면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대표 메뉴는 고기 국밥. 토렴한 밥 위로 돼지고기 수육이 넉넉히 올려져 나오고, 국물은 그릇 가장자리까지 가득 찬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진하게 우려낸 육수는 잡내 없이 구수하고, 숟가락을 넣을 때마다 딸려 올라오는 두툼한 돼지고기는 장터의 인심 그 자체다. 후루룩 국물을 들이켜면 전날 마신 술독은 물론, 마음속의 한기까지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반찬은 셀프. 셀프 코너에서 깍두기, 김치, 파채, 나물과 젓갈을 골라 담아와서 한상을 차리면 한정식 부럽지 않다.



‘지숙이네 호떡’에서 파는 호떡. 최갑수 제공

‘지숙이네 호떡’에서 파는 호떡. 최갑수 제공


배를 든든히 채웠다면 이제 달콤한 간식을 맛볼 차례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긴 줄을 마주하게 되는데, 십중팔구 ‘지숙이네 호떡’ 앞이다. 이곳의 호떡은 기다림조차 즐거움이 된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지듯 구워진 호떡을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한 겉면 속에 숨어 있던 뜨거운 설탕 시럽과 씨앗들이 입안 가득 퍼진다. 쑥이 들어가 은은한 초록빛을 띠는 호떡은 향긋함까지 더해져 물리지 않는다. “뜨거우니 조심해 먹읍서”라며 건네주는 사장님의 무심한 듯 다정한 한마디에 호호 불어가며 먹는 호떡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당 떨어진 여행자에게 이만한 처방전이 없다.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제주에 왔다면 보말(고둥) 맛은 보고 가야 한다. 시장 한쪽 국숫집에 들러 보말칼국수를 주문해보자. 걸쭉한 초록색 국물은 보말의 내장을 터뜨려 끓여냈다는 증거다.



“국물이 끝내주마씸!” 쫄깃한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면 입안 가득 바다 향이 퍼진다. 꼬들꼬들 씹히는 보말의 식감도 재미있다. 화려한 기교 없이 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는 보말칼국수는 제주의 거친 바다를 닮았다. 한그릇 비우고 나면 뱃속이 든든해지면서, 비로소 내가 제주도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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