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의 음악이 ‘차원이 다른 이유’는 감성적인 선율과 중독성 있는 우울한 정서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 곡의 핵심은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감상자의 감각이 발생하도록 하는 환경 자체를 촘촘하고 예리하게 설계하는 데 있다. [게티이미지/Photo by Brian Rasic] |
하나의 코드가 울리면
현실이 지워지고 이미 음악 속 공간에 들어와있다.
바닥이 사라지고, 공기는 느려지고, 시간은 자취를 감춘다.
부드럽고, 연약하고, 서글픈 목소리.
부유하고, 침잠하고, 떠다닌다.
깊게 침투한 감정은 곡이 끝나면 조용하게 닫힌다.
슬프고, 몽환적이고, 무한히 잠겼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 세계로 들어가길 기꺼이 반복한다. 배경이 아닌 공간이 되는 음악…라디오헤드가 듣는 이에게 닿는 방식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음악 대부분은 곡의 시작과 함께 듣는 이를 곡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에 가까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귀를 기울일 준비도 하기 전에, 하나의 기타 스트로킹, 하나의 리프, 하나의 드럼 루프만으로 현실은 밀려나고 청자는 빠르게 곡의 내부로 진입한다. 이는 이들의 곡이 ‘전개’되는 방식이 아닌, 완성된 정서가 ‘공간을 제시’하기 때문인데, 듣는 이는 음악을 듣는 순간 곡을 감상하는 위치가 아닌 그들의 음악 안에 놓여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닌 감성이 발생하게 만드는 음악. 기타는 멜로디를 이끌기보다 공기를 만들고 베이스는 리듬을 지탱하는 동시에 공간의 밀도를 조정한다. 신시사이저와 이펙트, 인파가 오고가는 효과음 등은 장식이 아닌 공간의 질감을 형성한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제공하는 기묘한 감각 중 하나는 무중력의 체험이다. 음악을 배경으로 두고 감상하는 상태를 넘어, 곡에 완전히 빠져들어 그 안에서 부유하고 떠다니게 만드는 듯한, 흡사 명상에 가까운 이 감각은 이들 곡이 가지고 있는 정서 구조와 기타 사운드 혹은 톤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불안정한 코드 진행과 리듬의 변주, 그리고 의도적으로 균형을 흩트린 화성 구조에서 발생한다. 이 불완전한 균형은 라디오헤드 음악 특유의 침잠과 부유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들의 곡은 대체로 일정한 서사 구조를 갖는다. 도입부에서 듣는 이를 끌어들이고, 사운드를 통해 감정을 침잠시키며, 중반부 이후 감정을 응축해 절정으로 끌어올린 뒤 마지막에는 감정들을 정리하며 감상자를 현실로 돌려 보낸다.
‘페이크 플라스틱 트리’(Fake Plastic Trees)는 담담한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크로 시작해 점차 감정을 끌어올린 뒤, 클라이맥스에서 강렬한 일렉기타 사운드를 넣어 절망과 애달픔의 감정을 분출하고는 고요하게 속삭이듯 다시 가라앉는다. ‘엑시트 뮤직’(Exit Music)은 읊조리는 듯한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의 어둡고 우울한 코드만으로 1분30초 가량 곡을 진행하고는 흡사 망자들의 합창같은 백보컬과 함께 곡의 레이어를 쌓아가다 드럼이 들어오며 절정으로 치달은 뒤 정적 속으로 사라지며 곡이 끝난다. 또 다른 명곡인 ‘노 서프라이즈’(No Suprises)는 같은 리프를 반복하며 잔잔하게 흐르다 곡 말미에 공허를 남기고는 듣는 이를 라디오헤드의 세계 밖으로 귀환시킨다.
절정 이후의 고요한 정화 구간을 갖는 구조는 라디오헤드 음악의 핵심적인 미학이다. 이들은 감정을 끌어올리며 터뜨린 뒤 반드시 여백을 남기며, 듣는 이는 그 여백에 잠기며 곡의 종결을 맞이한다. 감정은 해소되고, 정리되고, 남는 것은 안락함과 닮은 정서의 잔상이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다소 어둡고 몽환적이고 우울하지만 해롭지 않게 감상자 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She looks like the real thing
She tastes like the real thing
My fake plastic love
If I could be who you wanted”
(그녀는 마치 진짜인 것 같아
진짜인 것 같은 향미도 나지
가짜 플라스틱으로 만든 나의 사랑
그저 내가,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 라디오헤드, ‘페이크 플라스틱 러브’ 中 -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음악 대부분은 곡의 시작과 함께 듣는 이를 곡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에 가까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귀를 기울일 준비도 하기 전에, 하나의 기타 스트로킹, 하나의 리프, 하나의 드럼 루프만으로 현실은 밀려나고 청자는 빠르게 곡의 내부로 진입한다. 이는 이들의 곡이 ‘전개’되는 방식이 아닌, 완성된 정서가 ‘공간을 제시’하기 때문인데, 듣는 이는 음악을 듣는 순간 곡을 감상하는 위치가 아닌 그들의 음악 안에 놓여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게티이미지/Photo by Gie Knaeps] |
“대중음악으로 의미를 따져? 듣고 좋으면 그만이지”…라디오헤드의 작품이 ‘설계’하는 것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차원이 다른 이유’는 감성적인 선율과 중독성 있는 우울한 정서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 곡의 핵심은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감상자의 감각이 발생하도록 하는 환경 자체를 촘촘하고 예리하게 설계하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라디오헤드는 흔히 말하는 대중음악의 역할을 넘어선다.
예술철학에서 대중음악과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비단 장르나 난이도로 구분되지 않는다. 핵심은 즉각적인 쾌감(‘멋있다’, ‘신난다’, ‘듣기 좋다’)을 주고 소비되는 작품인지, 아니면 감상자의 지각과 감각 구조 자체를 바꿔버리는 작품인지에 있다.
대중음악이 흔히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후렴, 직설적인 감정 전달, 난해하지 않고 이해되기 쉬운 구조. 이같은 역할론적인 측면에서 라디오헤드는 흔히 말하는 ‘상품으로서의 음악’과 결을 달리한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대중음악의 유통 구조 안에 있으면서도(중반기 이후에는 이 구조조차 자발적으로 무너뜨리지만) 청취 경험 자체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들의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환경이 되고, 소비 대상이 아니라 체험 대상이 된다. 대중음악이 소비의 리듬 위에서 빠르게 소모되는 콘텐츠라면,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반복적인 체류를 요구하는 쪽이다. 한 번 듣고 지나가는 음악이 아니라, 머무르고 잠기고 빠져나오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드는 음악, 즉 이들의 음악은 하나의 경험 공간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이같은 구조는 아도르노(Adorno)식 예술론에서 말하는 ‘자율적 예술’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자율적 예술은 당장의 쾌감보다 지각의 방식을 바꾸는 데 초점을 둔다. 라디오헤드는 대중음악의 문법을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 규칙을 스스로 만들며, 낙하-부유-귀환 같은 감상자의 감각과 인식을 이동시키는 장치를 구축한다. 곡의 길이, 밴드 편성, 훅과 리프 같은 대중음악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시간 설계와 공간감, 다이내믹의 층위, 인간적인 보컬의 질감을 촘촘히 배치한다.
그렇기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의미보다 경험이 먼저 도달한다. 가사를 해석하기 전에 이미 곡 안에 들어와 있고, 메시지를 이해하기 전에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 ‘음악과 내가 한 공간에 머물다가 마침내 나 자신마저 사라지고 음악만 남아있는 경험’ 등의 감각이 발생하며 현실을 지우고, 또 다른 감각의 질서를 일으킨다. 감상자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겪는다’.
이때 라디오헤드는 장르로서의 록 밴드를 넘어 감각을 설계하는 예술가 집단에 가까워진다. 이들의 음악은 듣는 이에게 무엇을 느끼라고 결코 강요하지 않지만 느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조건 안에서 감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침잠하고, 부유하고, 귀환한다.
라디오헤드가 소비되지 않고 체험되며, 대중음악을 넘어선 예술로 체감되는 핵심이다.
“We hope your rules and wisdom choke you”
(너의 규율과 지혜가
너의 목을 졸라 질식시키길)
- 라디오헤드, ‘엑시트 뮤직’ 中 -
톰 요크는 전통적인 의미의 ‘위대한 보컬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결에 서 있게 된다. 그는 기교로 듣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카리스마로 군림하지 않으며,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 또한 라디오헤드가 갖는 경이로움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Photo by Mondadori Portfolio] |
반쯤 감긴 한 쪽 눈…라디오헤드의 핵심축, 톰 요크의 감각을 ‘이식’시키는 목소리
라디오헤드가 감각을 설계한다면 톰 요크(Thom Yorke·보컬)의 목소리는 그 설계가 감상자에게 실제로 도달하게 하는 핵심적인 매개체다. 사운드는 공간을 만들고 구조는 경험을 조직하지만 그 공간에 온도를 부여하고 인간의 결을 남기는 것은 결국 보컬이다. 라디오헤드의 세계가 비인간적으로 닫히지 않는 이유는 톰 요크의 목소리가 극도로 섬세한 떨림을 남기기 때문이다.
톰 요크의 보컬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나약함’ 혹은 ‘연약함’이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거나 미성이기 때문이 아닌, 보컬 자체가 결이 얇고, 감정이 피부 가까이에서 진동하는 느낌을 주며, 흔들리는 호흡과 미세한 떨림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흔히 록 보컬이 힘과 확신으로 공간을 장악한다면 톰 요크는 불확실성과 취약함으로 공간을 채운다. 그리고 그 취약함은 곡의 정서를 표현한다기보다, 감상자의 신체 감각에 직접 이식되는 방식에 가깝다.
또 다른 특징은 ‘히스테릭함의 정밀함’이다. 톰 요크는 감정이 고조되는 구간에서 음색과 발성의 모양을 바꾸는 데에 특히 능한데, 곡의 절정 구간에서 그의 얇은 성대 접촉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지고, 호흡이 앞쪽으로 몰리며, 소리가 매끈하게 뻗기보다는 갈라지건나 긁힌 듯 스친다. 이때 감상자에게 도달하는 감각은 ‘균열이 발생하는 순간’의 쾌감이다. 이는 라디오헤드의 가장 과감한 실험작 중 하나로 꼽히는 ‘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Paranoid Android)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데, 톰 요크는 연속적인 서사 붕괴, 막(幕)의 광기 어린 변화에 맞는 다양한 보컬을 섬뜩할 정도의 귀기 서린 감각으로 구사한다. 서정적인 기타 리프, 공격적인 디스토션 파트, 합창처럼 쌓이는 코러스, 그리고 다시 고요로 내려가는 종결부까지, 여러 곡이 한 몸에 봉합된 듯한 이 무모한 다층 구조를 하나의 곡으로 성립시키는 힘은 바로 톰 요크의 보컬에서 나온다. 그는 이 한 곡 안에서 냉소적인 관찰자가 되었다가, 분노에 찬 공격자가 되었다가, 히스테릭한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무너진 인간처럼 가라앉는다. 그러나 모든 전환은 연기처럼 과장되지 않고 하나의 인격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톰 요크는 전통적인 의미의 ‘위대한 보컬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결에 서 있게 된다. 그는 기교로 듣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카리스마로 군림하지 않으며,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 또한 라디오헤드가 갖는 경이로움 중 하나다. 완벽하게 설계된 사운드 위에 올라선 미세한 떨림, 계산된 구조 위에서 흘러나오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균열. 라디오헤드가 구축한 거대한 감각의 세계가 그저 냉소적이거나 반항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이유는 그 중심에 흔들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톰 요크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노래하는 보컬 이상의 역할, 그 음악이 인간에게 닿는 감각의 통로로써 존재한다.
“I keep the wolf from the door
But he calls me up, calls me on the phone
Tells me all the ways that he‘s gonna mess me up
Steal all my children if I don’t pay the ransom”
(내 방문 앞에는 늑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전화를 걸고는
내 아이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들을 해치겠다고
그리고 내 인생을 망가뜨리겠다고 협박하지)
- 라디오헤드 ‘문 앞의 늑대’(A Wolf at the Door.) 中 -
라디오헤드는 음악을 통해 감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지도, 깔끔한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의 감각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으로 감상자를 초대한다. 그 세계는 현실과 단절되지도, 완전히 이어지지도 않은 채 미묘한 경계 위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한 곡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처럼 기억된다. [게티이미지/Photo by Jeff Kravitz] |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인해 진입장벽이 낮은 편에 속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난해하고 때로는 어렵다. 여기에 매 앨범마다 새로운 형식과 실험을 반복하기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어떻다’고 딱 잘라 정의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이들의 가사는 쉬이 해석되지 않고, 곡의 의미를 무리하게 붙잡으려 하면 이들의 음악을 온전히 감상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렇기에 이들의 곡은 메시지로 남지 않고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상태’로 남는 것에 가깝다. 듣는 이는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느끼기보단, 어딘가의 감각 세계에 다녀온 공기를 몸에 남긴 채 돌아온다.
곡이 끝난 뒤 남는 것은 현실로 귀환한 뒤에 남는 아련한 듯 몽롱한 잔상이다. 귀는 조용해졌지만 감각은 곡 안에 머물러 있고, 몸은 빠져나왔지만 인식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채 흔들린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세계. 라디오헤드의 곡을 들은 감상자는 여전히 곡 안에 반쯤 잠긴 채 약간은 멍한 상태로 홀린 듯 다음 트랙을 틀기도 하며 또 다시 그들의 세계에 빠져든다.
라디오헤드는 음악을 통해 감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지도, 깔끔한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의 감각 세계를 구축하고, 이같은 방식으로 감상자를 초대한다. 그 세계는 현실과 단절되지도, 완전히 이어지지도 않은, 미묘한 경계 위에 놓여 있다. 음악을 넘어 하나의 공간처럼 기억되는 음악.
그 공간은 언제나 조용히, 늘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은 밀도로 존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