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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두컷클래식] '난 그냥 니가 킹받으면 좋겠어'의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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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애]


결혼식장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신부를 데리고 도망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게다가 그 누군가가 신부를 산속에 버리고 사라진다면?

이 황당한 일은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페르 귄트》에서 발생합니다. '페르 귄트'는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 그리고 위 행동을 벌인 피의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주인공을 페르라고 부르겠습니다.

도대체 페르는 새 신부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던 걸까요?

놀랍게도 그에게는 어떤 원한도 없었으며, 범행 동기가 될 다른 이유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저 '그냥' 충동적으로 벌인 짓이었어요.

다행인 점은 '페르가 신부를 산속에 끌고 가 더 끔찍한 일을 벌이지 않을까?'하는 독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단순히 여성을 산속에 바로 버리고 떠나면서 이 어이없는 사건도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그 : <페르 귄트 모음곡 1번, Op.46>, '아침의 기분'




연극《페르 귄트》는 이렇게 '신부 약탈'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페르는 그 동네의 망나니 중에 상망나니로, 계속해서 책임질 수 없는 행동만 하고 사람들에게는 허세뿐인 말만 늘어놓습니다. 급기야 세계를 무대로 이 여자 저 여자를 탐하고요.

나중에는 '트롤'이라 불리는 북유럽 신화 속 요정까지 만나는데, 페르는 그녀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식까지 올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페르는 그 속내를 숨기기는커녕 당당하게 드러내고, 트롤의 아버지이자 산 왕은 페르를 혼쭐냅니다. 이때 페르는 죽고 사는 위기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한편 주인공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며 진실한 아들의 모습을 잠깐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또다시 세계를 돌아다니며 실체 없는 사업을 벌이고, 실패에 이어 동업자의 뒤통수까지 칩니다.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가 쓴, 이 연극을 위한 음악 중 '아침의 기분'이 바로 이때쯤 등장합니다. 4막 5장에서 풀숲을 헤치며 페르는 이렇게 말해요.

아! 이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곤충은 모래 구슬을 만들고 달팽이는 껍데기에서 깨어 나오네. 아침, 오 그것은 황금 같은 시간!

대사는 페르가 아프리카에서 맞는 아침의 기분을 설명해 줍니다. 그의 인생에서 잠깐 갖게 되는, 몇 안 되는 평온한 시간이에요.


참고로 그리그는 부수음악, 즉, 연극을 위한 음악《페르 귄트》를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한 모음곡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4곡의 <페르귄트 모음곡 1번>과 역시 4곡으로 구성된 <페르귄트 모음곡 2번>을 만든 것입니다. 링크 드린 '아침의 기분'은 <모음곡 1번> 중 첫 번째 곡에 해당합니다.

그리그 : <페르 귄트 모음곡 2번, Op.55>, '솔베이그의 노래



같은 작품에서 두 번째로 소개할 곡은 바로 '솔베이그의 노래'입니다. <모음곡 2번> 중 마지막 곡이에요. 그리그의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입니다. 링크 드린 모음곡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형태이지만, 원래 성악곡으로 태어났어요. 잘 알려진 한국어 가사도 소개해 드립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그대는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이 노래는 작품에서 '솔베이그'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부릅니다. 솔베이그는 연극의 초입, 결혼식 장면에서, 다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동네 사람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페르의 인생에 마지막이자 연극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며 작품을 제대로 완성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놀라운 인물인데요. 그녀는 젊은 나이에 만났던 페르를 하얀 머리가 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페르가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때에야 재회합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뒤늦은 재회에도 솔베이그는 절대 불평하지 않아요.

오히려 솔베이그는 페르를 '소중한 사람', '일생을 아름다운 노래로 채워준 사람', '소중한 아기'라고 표현하며 그를 품어줍니다. 페르는 어머니 같은 그녀의 품에서 잠들고요. 그때 등장하는 음악이 '솔베이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작품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입센의 작품 속 페르는 단순히 방황하는 문제아를 넘어, '참된 나를 찾는다.'는 작품의 주제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솔베이그는 페르 인생의 끝을 기억과 구원으로 완성해 주는 사람이고요. 기도, 용서, 사랑, 믿음이 '솔베이그의 노래'에 녹아 있어요.

그런데 작가 입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당시 노르웨이 민족주의를 꼬집는 의도까지 이 작품에 녹였거든요. 그러니까 입센은 페르를 통해 노르웨이적인 것의 과장됨을, 그의 허세와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통해 민족주의의 왜곡을 표현한 셈입니다.

입센은 작품을 통해 '민족주의는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노르웨이 사회에 던졌습니다. 과도한 민족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민족주의의 경계를 논의하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죠. 끝없는 자유와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 어디쯤, 그리그의 음악도 노르웨이와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겨울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노르웨이. 이번 칼럼은 노르웨이의 풍경과 시대적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페르 귄트》 이야기로 채워보았습니다.

작품 안에서만 보자면, 페르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처럼 '난 오늘 니가 킹받으면(열받으면) 좋겠어'라는 태도로 삶 전체를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페르 귄트》는 세계 곳곳에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시대, 같은 시간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고민과 해결 방안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송곳 같은 질문을 던졌던 작품인 것 같고요.

요즘 말로 '킹받는(열받게 만드는)' 주인공의 삶을 한번 따라가보며, 입센의 희곡과 함께 그리그의 음악까지 모두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글 · 유신애 - 클래식 음악 작가

저서: <로맨스 인 클래식>, <베토벤 빼고 클래식>

피아노 전공 후 클래식 전문 기자, KBS 클래식 프로그램 음악 코디네이터 활동. 현재는 강연과 북토크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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