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m 고원에서 만난 ‘순백의 위로’/정암사 수마노탑과 아우라지 애틋한 전설까지/가리왕산 케이블카 타면 백두대간 발아래
구불구불 산길을 오른다. 고도를 높일 때마다 하얀색이 더 풍성해지는 정상을 향해. 매서운 칼바람이 빚은 상고대. 잎을 다 떨군 낙엽송 가지마다 보석처럼 박힌 눈꽃. 그리고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눈으로 덮인 운탄고도와 발아래 겹겹이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아찔한 풍경까지. 해발고도 1330m 만항재에 오르자 온통 설국이다.
◆만항재 눈꽃 피었네
아우라지. |
만항재. |
구불구불 산길을 오른다. 고도를 높일 때마다 하얀색이 더 풍성해지는 정상을 향해. 매서운 칼바람이 빚은 상고대. 잎을 다 떨군 낙엽송 가지마다 보석처럼 박힌 눈꽃. 그리고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눈으로 덮인 운탄고도와 발아래 겹겹이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아찔한 풍경까지. 해발고도 1330m 만항재에 오르자 온통 설국이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
◆만항재 눈꽃 피었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 새해 겨울 여행은 내 안의 쓸데없는 찌꺼기까지 모두 비우고 한 해를 살아갈 용기와 희망으로 채우는 시간이다. 온통 설국으로 바뀐 숲길을 걷다 보면 새하얀 눈처럼 영혼까지 깨끗하게 비워지지 않을까. 기대와 설렘 안고 강원 정선군으로 달려 겨울이면 온통 눈 세상으로 변하는 만항재를 오른다.
만항재는 정선군 고한읍, 태백시 혈동, 영월군 상동읍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 고개.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함백산(1572.9m)을 끼고 있을 정도로 높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가 만항재이기 때문이다. 덕분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만항재의 매력이다. 사계절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봄에서 가을까지 수많은 야생화가 피고 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든다. 겨울이면 눈꽃과 서리꽃 상고대가 만발해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만항재. |
만항재 포토존. |
차에서 내리면 바로 설국이 펼쳐진다. 여름이면 야생화 축제가 열리는 하늘숲길공원으로 들어서자 이파리를 모두 떨궈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하늘을 향해 한 치의 휘어짐 없이 곧게 뻗어 올라간 낙엽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뤄 건강한 피톤치드를 쏟아낸다. 겨우내 내린 눈이 꽁꽁 얼어붙어 미끄럽다. 마치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조심스레 숲속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자 낙엽송과 하얀 눈이 어우러지는 풍경에 탄성이 터진다. 마치 은하수를 지상에 옮겨놓은 듯 몽환적이다.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에 선정된 이유를 잘 알겠다. 아이들은 눈밭에 뒹굴면서도 뭐가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아이 대신 반려견을 썰매에 태운 연인들은 숲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기느라 바쁘다.
만항재. |
하늘숲길공원 입구 맞은편 운탄고도에도 여행자들이 눈꽃을 즐기며 웃음꽃을 피운다. 운탄고도는 ‘석탄을 운반하던 옛길’이란 뜻과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고원 길’이란 뜻이 모두 담겼다. 석탄 트럭이 오가던 길이라 넓고 완만해 트레킹 명소로 인기가 높다. 전체 구간은 함백역에서 만항재까지 40㎞에 달하고 하늘마중길, 바람꽃길, 낙엽송길 등 난도가 다른 10여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 |
◆마음의 쉼표 찍는 정암사
만항재에서 고한읍 방면으로 10분을 내려가면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에 닿는다. 아담한 산자락이 포근하게 감싸는 정암사 적멸보궁 마당으로 들어서자 고요한 산사의 정적 덕분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는 명료해진다.
‘자장율사 주장자’ 주목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약 1300년 전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평소 사용하던 주장자(승려의 신분과 수행을 상징하는 불교 의식용 지팡이)를 이곳에 꽂았는데 세월이 흘러 고목 안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신라시대 진골 왕족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친 무림공이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키겠다고 발원해 자장율사를 얻었다.
자장율사 주장자. |
어느 날 왕이 자장율사에게 재상 자리를 주면서 거절하면 목을 베겠다고 겁박했지만 자장율사는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하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뜻을 굽히지 않고 출가했다. 636년 제자들과 당나라로 간 자장율사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뵙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가사, 발우(공양용 그릇)를 얻은 뒤 신라로 돌아와 문수보살을 다시 만난다. 자장율사는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보자는 문수보살의 말에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니 똬리를 틀고 있는 구렁이를 발견했고 이곳을 갈반지로 여겨 643년 정암사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창건 설화도 있다. 자장율사가 사북의 부처소산정에 탑을 세웠지만 번번이 무너져 간절히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에 흰 눈 위로 푸른 칡 줄기가 세 갈래로 뻗어 그곳에 탑, 적멸보궁,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정암사의 옛 이름 ‘갈래사’와 주변 지명 ‘상갈래’는 이 설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수마노탑. |
적멸보궁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고 적멸보궁 뒷산을 오르면 수마노탑을 만난다.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크고 작은 모양의 직육면체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든 높이 9m, 7층 모전석탑이 신비한 기운을 전한다. 1972년 해체보수 과정에서 탑 안에 있던 진신사리가 발견됐는데 모전석탑에 진신사리를 보관한 것은 수마노탑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특히 탑 기단에서 꼭대기 금속 상륜부와 풍경까지 완벽하게 보전된 귀한 문화유산으로 2020년 국보로 승격됐다. 수마노탑 건축 설화가 전해진다. 자장율사가 신라로 돌아온 뒤 신심에 감화받은 서해용왕이 보석인 마노석으로 탑을 쌓아 달라고 소원하자 자장율사가 탑을 조성해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얘기다. 용궁의 물길에서 온 마노석으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수마노탑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확인 결과 정선에서 나는 고회암(돌로마이트)을 벽돌 모양으로 갈아서 탑을 쌓은 것으로 확인됐다. 1300여년 동안 수차례 보수가 이뤄졌으며 현재의 탑은 적어도 고려시대 초기에 다시 축조했다.
정암사 문수전. |
석가모니 사리가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는 법당을 ‘적멸보궁’으로 부르며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경계의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을 담고 있다. 편액은 탄허 스님이 쓴 것으로 전해지며 천장의 단청 그림은 예술적 완성도와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장율사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자장각,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도 만난다.
아우라지. |
◆정선아리랑 시작된 아우라지
정암사를 떠나 북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 아우라지를 만난다. 꽁꽁 언 송천에는 큰 돌로 만든 징검다리와 나무다리가 나란히 놓였고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꾸민 아리랑다리도 놓여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를 알린다. 동쪽 골지천에는 아우라지 다리가 놓였는데 한가운데 설치한 커다란 초승달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직 차오르지 않는 상태의 초승달을 통해 정선아리랑의 중요 정서인 사랑, 이별, 기다림, 소망을 담았다. 또 다리 뒤편이 ‘달이 떠오른다’는 뜻의 월부계곡이어서 달을 주요 조형물로 선택했다. 밤에 조명이 켜지면 골지천에 달이 비치는 그림 같은 야경을 선사한다.
아우라지 처녀상. |
아우라지는 정선아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선아리랑의 가사는 수심편, 산수편, 애정편, 처세편, 무상편 등 다양하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잠시잠간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라는 가사로 이뤄진 애정편에 아우라지 지명이 등장한다.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이유다.
아우라지 총각상. |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 장쾌하게 흐르는 송천의 나무데크를 건너자 정선아리랑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아우라지 처녀가 애틋한 눈빛으로 강 건너를 응시하고, 골지천 맞은편에는 아우라지 총각이 한 손을 내밀며 애타는 표정으로 강 건너를 바라본다. 여량면 처녀와 유천리 총각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진다. 둘은 고요한 산속에서 은밀한 사랑도 속삭이고 동백도 따기 위해 싸리골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밤새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나룻배로 건널 수 없게 됐다. 이에 둘은 강 건너에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애를 태우며 진도아리랑을 불렀단다. 당시 뱃사공이던 지유성이 사연을 눈치채고 그 애달픔을 대신 불러줬다는 얘기도 있다.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지며 흐르는 곳이라 이런 이름을 얻었다. 정선과 태백 등의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터다. 한양까지 잘 운반하면 뗏목을 팔아 큰돈을 벌었는데 여기서 ‘떼돈’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가리왕산케이블카. |
가리왕산 정산 전망대. |
아우라지에서 서쪽으로 20분 거리에는 가리왕산 케이블카가 있다. 해발 419m 숙암역을 출발한 케이블카가 점점 고도를 높이자 눈 쌓인 백두대간의 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탄성이 터진다.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겹겹이 쌓인 높은 산들은 강원의 산세가 얼마나 험한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아찔한 절경을 감상하며 20분 동안 3.51㎞를 날아가면 해발고도 1381.7m 가리왕산역(하봉)에 도착한다. 옛날 맥국의 갈왕(가리왕)이 피난해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해서 갈왕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전망대에서 서자 청옥산(1256m), 중왕산(1371m) 등 고봉들이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숙암역에는 2018 평창올림픽에서 한국 설상 종목 최초로 은메달을 딴 정선 출신 ‘배추보이’ 이상호 선수 전시관과 다양한 올림픽 기념품을 전시한 알파인 플라자를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정선=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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