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장호항과 용화해변을 잇는 해상케이블카는 겨울 바다의 거친 숨결부터 어촌의 소박한 일상까지 한눈에 담아내는, 가장 입체적인 조망의 길이다. |
찬 바람이 불수록 여행은 뜨거워야 한다. 몸이 먼저 데워져야 비로소 감각도 깨어난다. 강원 삼척은 쉼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아는 도시다. 그 해답은 삼척 내륙 깊숙이 숨은 유황 온천에 있다. 매끄러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순간, 묵직하게 쌓였던 피로가 서서히 풀린다. 기분 좋은 온기를 품고 나선 7번 국도. 뜨끈한 온천에서 서슬 퍼런 동해로 이어지는 온도의 변주.삼척의 겨울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시린 마음을 녹이는 확실한 처방
강원 삼척시 가곡면 탕곡리. 태백산맥 깊숙이 들어앉은 두메산골이다. 삼척과 태백을 잇는 416번 지방도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외진 마을이다. 인적도 차량도 드물어 시간마저 제 속도를 잊은 채 더디게 흐른다. 정오가 가까워서야 산마루 너머로 햇살이 고개를 든다.
마을 앞으로는 덕풍계곡 용소골에서 발원한 가곡천이 유유히 흐른다. 탕곡리(湯谷里)라는 지명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절골에 머물던 스님들이 이곳에 노천탕을 만들어 몸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 이름 자체가 뜨거운 위로를 품은 거대한 욕장(浴場)이었던 셈이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온 덕분일까. 탕곡리에서는 지하 800m에서 하루 800여t의 온천수가 솟아난다. 수질 또한 독보적이다. 유황은 물론 미네랄과 실리카 성분도 풍부해 피부 건강과 묵은 피로를 개선하는 효능이 있다.
자연이 내어준 소중한 자원을 온전히 누릴 방법은 없을까. 2023년 4월에 개장한 가곡유황온천이 그 답이다. 소박한 산촌 풍경 사이로 당당히 들어선 4층 규모의 온천 건물은 탕곡리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온천 내부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미감이 돋보인다. 백미는 3층 스파 시설이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 중으로 퍼지는 진한 유황 냄새가 이곳이 온천임을 실감케 한다. ‘동굴 도시’ 삼척의 테마를 담은 동굴 스파부터 벽면을 타고 온천수가 폭포처럼 흐르는 쿨링 스파, 가족 여행객을 위한 키즈 스파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무엇보다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메인 풀장 너머의 풍경이다. 통유리창 가득 펼쳐지는 병풍바위의 절경은 마치 자연의 품 한가운데서 스파를 즐기는 듯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4층으로 올라가면 겨울 온천의 정점인 야외 자쿠지 풀이 기다린다. 영하의 찬 공기 속에서도 수온은 34~35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물속에 몸을 누이면 유황 온천 특유의 미끌미끌한 촉감이 비단처럼 피부를 감싼다. 머리 위로는 산촌의 맑고 찬 공기가 내려앉고, 장엄한 태백산맥의 능선이 시야 가득 웅장하게 자리한다. 뜨거운 온기와 서늘한 공기, 그리고 자연의 압도적인 위용. 시린 마음을 녹이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처방은 없다.
가곡유황온천 인근의 족욕 체험장은 정적인 휴식을 선사한다. 편백 향이 감도는 내부로 들어서면 통창 너머 가곡천 풍경이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특히 설경이 더해진 날의 운치가 압권이라고 했다. 체험은 목 뒤에 아로마 겔을 발라 긴장을 완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족욕은 버틸 수 있는 최대 온도로 발을 찜질하듯 담그는 것이 요령이다. 유황 온천 특유의 매끄러운 수질이 발을 감싸안으면,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씻겨 나간다.
마무리 과정 역시 체계적이다. 미용 소금으로 각질을 정돈하고 그 위에 페퍼민트 오일을 덧바르면 혈액순환을 돕는 즉각적인 냉각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온천수로 조리한 구운 달걀도 잊지 말자. 수분을 가득 머금은 촉촉함과 찰진 식감은 시중의 구운 달걀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하늘에서 쓰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온천과 족욕이 남긴 온기를 품고, 이제 서늘한 바닷바람에 몸을 맡겨볼 시간이다. 시선은 동해로 향한다. 동해의 척추를 따라 뻗은 7번 국도를 달리며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삼척의 바다를 만나보자.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잠시 잊어도 좋다. 도로 위 이정표와 파란 수평선을 나침반 삼아 마음 내키는 대로 운전대를 꺾으면 그만이다. 풍경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그 자유로운 방랑이야말로 7번 국도가 여행자에게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이다.
삼척의 핫플레이스를 그냥 지나칠 수야 있나. 장호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계절 내내 맑고 투명한 바다로 이름난 곳이다. 이왕이면 색다른 시선으로 만나보자. 선택지는 삼척해상케이블카다. 장호항과 용화해변 사이 874m를 가로지르는 하늘길은 푸른 동해를 가장 입체적으로 대면하는 통로다. 거침없이 뻗은 수평선이 시야 끝까지 넘실거린다. 케이블카라는 안온한 공간 덕분일까. 살을 에던 겨울바람마저 창밖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어느덧 포근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양쪽 정거장에는 산책로와 전망대가 있다. 용화역과 연결된 산책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어 걷는 내내 파도 소리가 가깝다. 발아래로는 바다 위에 보석처럼 박힌 기암괴석이, 시선 끝에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백사장으로 달려드는 파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정작 여행자의 발길을 붙드는 것은 해변 옆으로 나직하게 엎드린 어촌의 소박한 정취다.
용화해변 옆으로 흰색 건물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바다를 앞마당 삼아 단정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마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롭다. 화려한 수식 대신 바다의 채도와 바람의 결을 오롯이 담아낸 마을 풍경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을 보드랍게 매만진다.
백두대간과 동해를 한눈에 품다
이제 바다와 나란히 발을 맞춰보자. 장호항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덕봉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 섬이었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 육지와 연결되며 ‘덕산도’에서 ‘덕봉산’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맹방해변과 덕산해변 사이. 마읍천의 민물이 바다와 섞이는 길목에 외따로 솟은 이 산은 한때 군사 보호구역으로 묶여 반세기 넘게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덕봉산의 숨통이 트인 건 최근의 일이다. 해안 산책로가 조성되며 비로소 대중에게 품을 내주었다. 모래사장 위로 길게 뻗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섬 아닌 섬’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란스러운 일상은 파도 소리에 묻혀 서서히 멀어진다.
해발 54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그 안을 채운 소리는 웅장하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탐방로에 들어서면 장쾌한 파도 소리와 댓잎이 부딪치며 내는 바스락 소리가 근사한 이중주를 들려준다. 자연이 전하는 ‘오디오 가이드북’인 셈이다. 특히 동쪽 탐방로에 서면 바다와 단단한 땅 사이에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밀도 높은 고요함이 느껴진다.
정상까지는 느릿한 걸음으로도 20분이면 충분하다. 정상 전망대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어디에 눈길을 둬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화려한 절경 대신, 꾸밈없는 바다와 굽이치는 파도가 겨울 동해의 담담한 얼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내륙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면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가 겹겹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차갑다 못해 매서운 갯바람. 거친 해풍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이 작은 산의 단단함이 미덥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싶은 이들에게 덕봉산은 묵묵히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나지막한 위로를 건넨다.
시간이 머무는 삼척항의 산동네
동해안 어촌은 어떤 모습일까. 그 궁금증을 안고 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삼척항 인근 언덕배기에서 발길이 멈춘다. 화려한 리조트도, 하늘을 가리는 고층 건물도 없는 곳. 대신 오래된 생활의 온기가 골목마다 배어 있는 나릿골 감성마을이 자리한다.
나릿골은 삼척항의 옛 지명인 정라항과 맞닿은 골짜기에 배를 대던 나루에서 이름을 얻었다. 삼척항이 활기를 띠던 1960~1970년대.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 형성한 자연부락이다. 지금도 마을 주민 상당수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을은 낙후되었지만, 삶의 흔적을 억지로 지우지 않았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지붕을 고치고 담장에 벽화를 입혔을 뿐. 지난날의 생활상과 풍경은 그대로다. 누군가에게는 짙은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여운을 남긴다.
골목은 좁고 가파르다. 시멘트 계단과 낮은 담장, 자그마한 텃밭이 이어진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시야는 서서히 열리고, 골목 틈새로 삼척의 바다가 스민다. 골목 곳곳에는 빈집을 개조한 전시관과 작은 박물관이 들어서 바다와 함께 살아온 주민들의 삶을 담담하게 전한다.
마을 전망대에 오르면 삼척항과 나릿골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은하게 퍼지는 비릿한 바다 냄새.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고깃배가 햇살을 가르고 출항한다.
평온한 마을 분위기와 대비되는 항구의 분주함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나릿골에서 해돋이를 맞아보는 것도 좋겠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의 소망과 묵은 근심을 함께 내려놓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가 있을까.
삼척 | 글·사진 안영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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