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
늦은 오후부터 붉은 해가 길게 든다. 빛은 창과 벽에 이어 책상 위로 번진다. 책상 끝에는 지난봄에 들인 한 식물이 있다. 감자처럼 생긴 구근, 국수 가닥처럼 얇은 연녹색의 넝쿨손. 건조한 기후에서 자생하는 종이라 오래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만 채광과 환기에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넝쿨은 길게 길게 뻗어나갔다. 그러면서 작은 잎을 틔워냈다. 오래 집을 비우고 돌아온 어느 날 식물은 달라져 있었다. 생장을 멈추고 누렇게 변했다. 대신 새 넝쿨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하지만 과하게 물을 준 탓일까, 겨울로 접어들며 식물은 두 번째 덩굴을 거두었고 구근까지 말라 버렸다. 나는 화분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빛과 바람을 얻지 못하자 기존의 넝쿨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롭게 활로를 찾는 식물, 여전히 그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는 술도 사람도 좋아했다. 이 탓에 함께한 이들이 먼저 간다고 할 때마다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맞은편 이가 간다고 하면 잘 가라 말하며 한 잔, 옆에 앉은 이가 간다고 하면 조심히 가라며 한 잔. 결국 그날도 둘만 남았다. 막차 시간을 살피는 내 초조한 표정을 읽었는지 친구는 이제 우리도 가자고 했다. 술집을 나온 친구는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주었다. 택시 타고 가라고. 그때 친구의 지갑 속을 흘깃 보지 말았어야 했다. 단 7000원이 남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친구는 두 시간을 걸어 집까지 갔다. 차고 마른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이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친구와 있으면 밥이든 술이든 내가 산다. 다시 생각해도 친구의 지갑 속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모습은 남아 있다. 그리고 모든 모습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하나의 모습이 있다. 그녀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공항은 붐볐다. 연착된 항공편과 지연되는 항공편, 지친 얼굴의 사람들. 허기에 쫓겨 가까운 국숫집에 들어갔다. 국수가 나오자 그녀는 짐짓 신난 얼굴을 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처음 입에 댔을 때는 기침을 했다. 다시 면발을 몇 번 오르내렸다가 호로록 마시듯 먹었다. 그때 흰 국숫발과 함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검은 머리카락. 내가 놀란 표정을 채 짓기도 전에 모두 삼켰다. 어디에서든 나는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눈에 담았고 불행 앞에서는 손을 뻗어 서로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모든 시간 앞에 그 국숫집에서의 모습이 있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지만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슬프지 않다. 물론 기쁘다는 것은 아니다.
두 살 터울 친누나는 언제나 내게 새로운 것을 일러주던 존재였다. 나와 달리 마음이 밝았고 성격이 쾌활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가 많이 없었지만 누나 덕에 사람의 호의를 경험하며 자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 누나는 해외 출장이 많은 직업을 갖게 됐고 돌아올 때마다 옷이며 모자며 신발을 사 왔다. 그러고는 꼭 한마디씩 했다.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지 말고 사람처럼 입고 사람처럼 살라고 했다. 다툼도 많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가장 아픈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나를 통해 경험했다. 하지만 한순간도 누나를 미워한 적은 없다. 어느 날 누나에게 받은 선물 때문이다.
누나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우리 남매는 큰집에 맡겨졌다. 나는 누나가 돌아올 시간만 기다렸다. 한번은 학교에서 돌아온 누나가 대뜸 나를 보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눈을 뜨자 누나 손에는 붉은 알사탕이 있었다. 하굣길에 친구가 사탕을 하나 주었는데 일단 입속에 넣고 먹는 척을 하다 나를 줄 생각으로 몰래 사탕을 뱉은 다음 손바닥에 쥐고 돌아온 것이다. 그때 누나 손바닥에는 마치 붉은 신호등처럼 동그랗게 사탕 물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누나의 손바닥에는 그 붉은 사탕 물이 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나를 떠올릴 때마다 매번 붉어진다.
사람들에게 내가 보인 숱한 모습, 그중 지지 않고 가장 앞줄에 서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박준 시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