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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터전 잿더미로”… 구룡마을 화재에 갈 곳 잃은 주민들

조선비즈 이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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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어요. 마흔 해를 넘게 살았는데, 손에 남은 게 하나도 없어요.”

16일 오전 12시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마을 입구 앞에서 만난 고재옥(85)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오전 5시쯤 화마를 피해 급히 집을 나선 그가 손에 쥔 것은 휴대전화 한 대가 전부였다. 고씨는 “어떻게든 불을 막아달라고 애원했는데 결국 못 막았다”며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이호준 기자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이호준 기자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에서 이날 새벽 대형 화재가 발생해 주민들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4지구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인접한 5·6지구를 덮쳤다. 이재민들은 “모든 게 불에 사라졌는데, 갈 곳도 가진 것도 없다”고 토로했다.

◇연기 가득한 마을… 마스크도 없이 발 동동

오전 11시쯤 구룡마을 일대는 매캐한 화재 연기가 하늘에 뒤덮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상태였다. 마스크 없이는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으나, 경황 없이 대피한 주민 중 마스크를 쓴 이는 열 명 중 한두 명에 불과했다. 별도의 마스크 제공이 이뤄지지 않아, 개인적으로 준비한 주민들만 겨우 연기를 막고 있었다.

주민들은 소방차 사이로 모여 타버린 집이 있는 마을 안쪽을 응시했다. 일부는 휴대전화를 들고 타버린 집이 있던 방향을 촬영했고, 일부는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봤다. 한 주민은 가족과 통화하며 “몸은 괜찮은데 집이 다 타버렸다. 이게 정말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인근에서 주민들이 식사 중이다. /이호준 기자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인근에서 주민들이 식사 중이다. /이호준 기자



급하게 집을 빠져나온 탓에 손가방조차 챙기지 못한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주민 김모(63)씨는 “오전 5시 20분쯤 주민 단체 대화방에 화재 소식이 올라와 모두 급히 대피했다”며 “그 상황에서 짐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번 화재로 가장 큰 피해를 본 6지구는 구룡마을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약 150가구가 밀집해 있다. 6지구 주민 심모(78)씨는 “아들과 살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며 “눈물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장 오늘 저녁엔 어디로 가나” 막막한 생계

낮 12시 무렵, 구룡마을 입구 앞 주민자치위원회 식당은 이재민들로 가득 찼다. 10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20여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콩나물국과 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주민 A씨는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인데, 이 정도라도 챙겨줘서 다행”이라면서도 “당장 저녁에는 어딜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걱정이다”라고 했다.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인근 식당의 모습. /이호준 기자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인근 식당의 모습. /이호준 기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민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몸은 괜찮냐” “집은 불에 안 탔느냐”는 말이 오갔다. 주민 B씨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령자인 탓에 대피 과정에서 옆집 할머니를 부축해 나왔다”며 “일단 인명 피해가 없다고 하는데, 그러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후 12시 30분쯤, 한 80대 주민은 캐리어를 끌며 불에 탄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화재가 났을 때 이를 틈타 도둑이 든 적이 있어 이번엔 중요한 옷가지부터 챙겨 나왔다”며 “그것마저 못 챙겼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캐리어를 든채 화재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호준 기자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캐리어를 든채 화재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호준 기자



◇소방당국, 화재 원인 조사 착수

마을 한편에는 대한적십자사가 가져온 담요와 생필품이 쌓여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날씨가 추운데 언제쯤 받을 수 있느냐”며 묻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주민 대표들과 협의를 마친 뒤 지구별로 순차 배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화재는 약 6시간 30분 만에 큰 불길이 잡혔다. 소방당국은 이날 오전 11시 34분쯤 대응 단계를 2단계에서 1단계로 낮추고, 잔불을 정리했다. 소방당국과 경찰은 화재 진압을 마무리하는 대로 정확한 경위를 조사할 예정이다.

이호준 기자(hjo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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