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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 피투성이, 눈도 못 감아"…독립 길목서 스러진 '광야'의 시인[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윤혜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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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1934년 6월 20일 신원카드/사진=국사편찬위원회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1934년 6월 20일 신원카드/사진=국사편찬위원회


조국 광복을 불과 1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16일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불꽃 같은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가 마흔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으로 6명의 형제 중 차남이다. 1920년 안일양과 결혼한 후에는 백학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교편을 잡았다. 1923년에는 4월 학기에 맞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활약한 노동운동자 김태엽에 따르면 이육사는 당시 흑우회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자 단체 회원이었다. 이육사는 조선인 유학생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투쟁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을 휩쓴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이 광기 어린 폭력에 희생됐다. 이육사는 힘없는 식민지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다.

귀국 후인 1927년 10월 18일 이육사는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에 연루된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꿀단지에 폭탄을 숨겨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폭파하려한 항일 의거로, 폭탄이 담긴 꿀단지의 필적이 동생 이원일의 글씨체와 똑같다는 억지 구실로 네 형제가 모두 연행됐다. 당시 과수원 나들이를 즐기던 첫째 원기, 둘째 육사, 셋째 원일, 막내 원조는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된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23살의 이육사는 대구 형무소에 끌려가 1929년 진범이 체포될 때까지 1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 이육사의 수인번호가 264였다. 이 수인번호에서 숫자 그대로 따와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다가 이후에는 이름에 새로운 뜻을 새겨넣었다. 처음에는 고기 육에 설사할 사를 사용해 '고기를 먹고 설사하겠다'는 뜻을 부여했다. 식민지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다 죽일 육에 역사 사를 사용해 일제 식민의 역사를 죽여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뜻을 넣었고, 이 뜻이 너무 세다는 집안 어른들의 만류에 '땅 육'자로 바꿨다고 한다. 대륙을 품은 역사 또는 역사를 대륙처럼 평평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육사는 1930년 광주학생항일투쟁 여파로 대구청년동맹 간부로서 붙잡혀 감옥에 갔으며, 이듬해에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렇게 이육사는 17번의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이육사의 딸 이옥비는 "무슨 일만 터지면 우리 아버지를 체포했다. 대나무를 어슷하게 썰어서 다리 사이에 끼우고 훑어내는 잔인한 고문, 살이 뚝뚝 떨어지는 고문을 당하셨다. 어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감옥에 솜바지 2벌을 넣어주면 다 피로 물들어서 돌아왔다"며 "아버지가 주요 감시 대상이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일본 경찰이 집으로 와 어머니를 괴롭혔다. 의자도 던지고, 임신 중에 따귀도 맞았다"고 했다.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우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사진/사진=이육사 문학관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우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사진/사진=이육사 문학관



이육사는 굴복하지 않고 신문 기자 생활을 이어나갔다. 언론 활동을 통해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28세가 된 1932년에는 중국 난징으로 가 김원봉 단장이 창설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했고 이듬해 1기생으로 졸업했다. 이곳에서 이육사는 정치, 철학 등 기본 교육은 물론 폭탄 제조 및 투척법, 변장법, 무기운반법, 사격술 등을 배웠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육사는 김 단장으로부터 난징에 남아 후학을 양성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군사간부학교 1기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의 자수로 같은 학교 출신 졸업생이 연이어 검거됐다. 이육사도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육사는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의 고문을 견뎌야 했다. 수감된 지 3개월 후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됐지만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졌다. 이때부터 총 대신 펜을 잡기 시작했다.

1935년 이육사는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스트 시인 김광균, 윤곤강 등과 함께 시 동인 '자오선'을 발간하기도 하고,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 간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9년에는 문장 8월호에 '청포도'라는 제목의 시를, 1940년 1월에는 '절정'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모두 독립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었다.

오랜 옥고를 치르며 건강이 악화됐지만 이육사는 다시 무력 투쟁을 준비하며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고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43년 7월 모친과 맏형 제사에 참석하러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딸 이옥비는 당시 얼굴엔 용수를 쓰고, 손은 포승줄로 감겨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이옥비는 "끌려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다렸다. 아버지가 왔는데 그 모습이 두려워 몸이 덜덜 떨렸다. 아버지가 출발할 시간이 되니 '아빠 다녀오마'라고 떠났다고 한다. 이게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며 "돌아가실 줄 아셨는지, 저희 집이 부자가 아니었는데도 백화점에서 자주색 벨벳 투피스와 핑크색 모자, 검은 가죽 구두를 사오셨다. 독사진을 찍어서 가족들에게 돌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육사는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1월 16일 40살의 나이로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시신을 거둬 화장했다. 이병희는 "소식을 듣고 가서 본 건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눈도 감지 못한 육사의 모습이었다"며 "뒤처리를 내가 다 할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말하며 눈을 쓸어줬더니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했다. 유골은 동생 이원창에게 인계됐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1960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이장됐다.

이육사의 대표적인 시 '광야'는 사후 동생 이원조에 의해 공개됐다. 이육사는 시를 통해 말했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윤혜주 기자 heyjud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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