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l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인플루엔셜(2025) |
새해 처음 읽을 책으로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복복서가)을 골랐다. 회고록 성격이 있는 이 책은 “엄마의 비밀”로 시작한다. 어머니에게 다가온 알츠하이머, 그리고 작가가 빈소에서 듣게 된 어머니의 젊은 날에 관한 이야기이다. 놀랍지 않게도 보통 자식들은 엄마와 아빠가 부모가 아니었던 시간을 잘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다 부모의 삶 대부분이, 혹은 전부가 지나간 후에야 깨닫는다. 그들에게도 나를 상상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구나.
이 에세이를 읽으며 떠올린 소설이 있다. 줄리아나 배곳의 작품집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에 수록된 단편 ‘역노화’이다. 작가가 아들과 공저한 이 소설은 서른네살의 딸과 여든살 아버지의 기묘한 여행을 다룬다. 딸에게 상처만 남긴 냉정한 아버지는 죽음을 맞아 의료기관에서 역노화 과정을 선택하고 참관인으로 딸을 부른다. 역노화는 하루에 10살씩 젊어지다가 끝내는 아기로 돌아가 사망하는 존엄사 방식이다. 딸은 내키지 않지만, 결국 아버지와 마지막 일주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70대의 아버지는 원기를 되찾고, 60대의 아버지는 오만한 개자식이었으며, 40대에 이르러서야 날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나를 모르는 시절로 돌아가고, 20대에는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나는 냇가에서 올챙이를 잡던 9살의 아버지가 제일 좋았으며, 마침내 아빠를 내 품 안에 끌어안는다.
‘역노화’의 원제는 뒤로 돌아간다는 의미인 ‘Backwards’(백워즈)이다. 이 소설은 우화이지만, 노인이 있는 가족이라면 모두 실감하는 현상이다. ‘단 한 번의 삶’에서 말년에는 며느리도 잘 알아보지 못했던 엄마는 시청 광장과 을지로를 보며 20대를 떠올린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이렇게 거슬러 되돌아가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고, 옆에 있는 자식의 존재를 잊지만, 활발히 도심을 활보했던 젊은 날과 들판을 뛰어다녔던 소년기를 다시 산다.
나는 이 소설을 2022년 11월에 읽었다. 출판 전 원고를 읽고 국내 출간 적합 여부를 검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때는 인상 깊은 에스에프(SF) 설정이라고만 여겼다. 내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 지금은 이 이야기가 SF가 아님을 안다. 아직 초기이긴 해도, 클래식 음반을 사 모으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이제 책을 읽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는 한다. 여전히 내 아빠로 남아 있지만, 하루하루 아이에 가까워질 것이다.
새로운 1년이 온다는 건 그런 일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 만큼 뒤로 돌아가고, 마침내 아이가 될 날에 가까워진다. 모두에게 변함없이 닥치는 슬픈 운명이다. 그렇지만 이 슬픔이 있기에 비로소 내가 없던 시절, 인간으로서의 부모를 보게 된다. 그도 나처럼 어렸고 방황했고 좌절했으며 희망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해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단 한 번의 삶을 걸어갈 각오가 되어주기를, 다시 어려지는 가족과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기를. 올 새해의 희망이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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