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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을 위한 양자역학[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동아일보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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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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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얼마 전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스마트폰으로 몰아서 봤다. TV도 없고 드라마도 거의 보지 않지만, 주변에서 “교수님, 이건 꼭 보세요”라고 권하자 호기심이 생겼다. 중간에는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섬찟했다. 피하고 싶은 장면에서는 전원을 끄고 싶었다.

마지막 회까지 다 보고 나니 새벽이 됐다. ‘김 부장’ 김낙수와 부인이 함께 황톳길을 걸으며 과거에 잘한 선택과 잘못한 선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따뜻한 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삶에 잘한 선택과 잘못한 선택이 있을까.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잘되건 못되건 50 대 50 확률의 가지치기가 인생이다. 선택하느냐 마느냐, 가느냐 마느냐. 선택한 확률은 현실이 된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확률은 어떻게 될까. 사라지는 것일까.

양자역학에서는 확률이 사라지지 않는다. 양자론이 자연의 근본 이론이라면, 그 확률적 구조는 미시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도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1957년 미국 프린스턴대 대학원생이었던 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는 박사 논문을 통해 이른바 ‘다세계 해석’을 제안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우주는 양자적 선택이 일어날 때마다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진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역시 수없이 나뉜 가지들 중 하나다.

선택되지 않은 다른 평행우주는 어디에 있을까. 이 세계는 우리와 상호작용할 수 없으므로 관찰할 수 없다. 우주의 모든 가능성마다 우주가 분기한다면 엄청난 수의 우주가 계속 생겨날 것이다. 양자역학에 관한 여러 해석 가운데 평행우주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해석은 다세계 해석이 유일하다. 평행우주론을 반대했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선택하지 않은 길은 의미를 잃으며,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물을 수 없다. 선택되지 않은 우리의 아쉬운 운명을 물을 수 없듯이.

이 드라마를 보고 형제 같은 대학 후배가 생각났다. 그림 동아리에서 함께 놀던 시절부터 졸업 뒤 대기업에서 사장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성공의 갈림길을 무사히 지날 때마다 함께 건배를 들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후배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했다. 열심히 살아온 후배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축축해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내려가 조카와 이끼를 키우고 있다. “형, 세상에서 이끼가 제일 이뻐.”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김 부장 드라마를 보고 나서 조금 실감이 됐다.

드라마 마지막에 아내 박하진이 김 부장에게 “상가 분양 사기를 안 당했으면 더 큰 사고를 쳤을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과연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 더 나쁜 결과를 막을 수 있었을까.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물리학자로서 내 판단은 이 세상에 나쁜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선택은 ‘죽음’뿐이다. 그 나머지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좋은 선택’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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