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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 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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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섬에서 미노타우르스를 무찌르고 돌아올 때 탄 배는 오랜 세월 아테네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배는 수백년이 흐르면서 판자가 썩고 기둥이 무너졌다. 그때마다 부품이 하나씩 교체됐다. 결국 원래 부품이 한 조각도 남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이건 테세우스의 배일까?”

장민주 외교안보부 기자

장민주 외교안보부 기자

그렇다면 역으로 질문해 보자. 테세우스의 배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 배의 본질이 바뀔까.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표(말·글자)’와 ‘기의(의미·개념)’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단어가 현실을 직접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상징이라고 봤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바꾸지 않는다. 기표만 달라졌다고 해서 그에 담긴 기의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이름을 바꿔 본질을 흐리려는 움직임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감지된다.

최근 노동부는 ‘쉬었음 청년’이라는 용어를 ‘숨 고르는 청년’, ‘준비중 청년’으로 바꾸려고 했다.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 청년이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 중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다.

이렇게 바꾸면 현실의 어려움이 해결되는 건가. 청년들이 처한 구조적인 실업, 불안정한 고용환경, 기회의 불균형은 용어 하나로 덜어낼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당사자인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고용조건 개선과 지속적인 지원이다. 언어는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실제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는다면 언어는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다. 현실에 대한 천착 없이 이름만 바꿔 보겠다는 시도는 ‘보여주기 행정’처럼 비칠 수 있다.


통일부가 최근 추진 중인 ‘북향민’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기존 법적 명칭인 ‘북한이탈주민(탈북민)’에 담긴 이탈이라는 단어가 주는 낙인을 덜기 위해 바꾸겠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북향민이라는 말은 오히려 ‘북으로 향하는 사람’이라는 혼란을 준다는 지적이 많다.

당사자들의 불만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한 탈북민은 “또 다른 타자화일 뿐”이라며 “이미 여러 명칭이 있는데 또다시 새로운 이름을 붙여 북한 프레임을 씌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현실의 차별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행정적 혼란과 불필요한 예산 낭비만 초래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탈북민의 지적은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행정 용어 하나를 바꾸는 데 들어가는 지원과 정성이 실제로 당사자의 삶을 얼마나 바꾸는지 따져봐야 한다. 북향민으로 명칭만 바꾸고 현실이 그대로라면, 그건 기획서에만 존재하는 상징 조작에 불과하다.


정책은 용어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 돼야 한다. 쉬었음 청년이 준비중 청년, 탈북민이 북향민으로 불린다고 해도 실제 조건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다. 테세우스의 배를 미노타우르스의 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배에 담긴 영웅의 이야기가 바뀌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장민주 외교안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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