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쉬트 07769>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뒤 국내에 번역된 첫 작품이다. 묵시록 문학의 대가답게 이번 소설에도 종말 혹은 파멸의 징조가 담겼다. AP연합뉴스 |
독일 튀링겐의 가상 마을 카나에 사는 헤르쉬트 플로리안은 힘세고 덩치는 크지만 어리숙한 청년이다. 부모가 없는 자신을 거둬준 보스의 청소회사에서 일하며 동네 주민들의 잔심부름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동네 바보’ 같지만 퀼러씨의 물리학 수업을 진지하게 듣기도 한다. 문제는 그가 수업을 듣다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 문제에 집착해 곧 세상이 붕괴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버린 데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10557, 베를린, 빌리 브란트 슈르트라세” 그는 위대한 지도자 메르켈에게 이 위험을 알리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보내는 이 주소엔 ‘헤르쉬트 07769’만 적는다. 07769는 그가 사는 지역의 우편번호다.
아이러니로 가득 찬 소설 <헤르쉬트 07769>는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후기작으로 2021년 현지 출간됐다. 작가가 노벨상을 받은 뒤 국내에 번역된 첫 작품이기도 하다. 묵시록 문학의 대가답게 이번 소설에도 종말 혹은 파멸의 징조가 담겼다. 문장이 수식이 많고 만연체로 쓰인 경우가 많아 번역이 힘들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의 작품답게, 이번 소설도 읽기 쉽다고 보긴 어렵다. 전작에서도 쉼표 사용이 많았지만 이번엔 더 급진적이다. 모든 문장은 쉼표로 연결돼 있고 문장을 종결하는 온점은 600쪽이 넘는 책의 마지막에 단 한 번만 쓰였다.
퀼러는 헤르쉬트가 자신의 수업을 듣고 베를린에 편지를 보내는 이상 행동을 하자 자책감에 빠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사이 마을엔 늑대가 나타나 명망 있는 유대인 링어 부부를 덮치는 일이 벌어진다. 튀링겐의 자랑이자 보스의 우상인 바흐와 관련된 역사적 건물에 ‘우리(WIR)’라는 단어와 ‘늑대 머리’를 그려넣은 그라피티 테러가 일어난 것도 이즈음이다. 보스는 분노하며 헤르쉬트와 함께 그라피티를 지우러 다닌다. 보스는 차를 타고 갈 때면 헤르쉬트에게 국가를 부르라고 시킨다. 잘 부르지 못할 때 “네 목소리가 너무 맥이 없어. 플로리안, 너 유대인이나 뭐 그런 거냐?”라는 타박이 돌아온다.
라슬로의 노벨상 수상 후 첫 번역작
600여쪽이 단 한 문장으로 구성돼
자신도 모르게 네오나치 가담하는
어리숙하나 착하고 성실한 주인공
극단주의에 동원되는 시민 연상
보스의 청소회사가 내세운 슬로건은 ‘알레스 비어트 라인(Alles Wird Rein)’,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rein’은 ‘깨끗하다’ 외에 ‘순수하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는 나치의 순수 혈통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도 이어진다. 보스가 네오나치와 연결된 인물이라는 것이 책의 초반부터 드러나고 작중 인물들 역시 의심하는 바이지만 헤르쉬트는 모른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느냐, 그들이 모두 나치라는 것을 모르느냐?” “오, 호프 부인, 저는 그런 일들 아무것도 모릅니다, 플로리안은 대답했다,” “어떻게 이 아이는 그렇게 깜깜 모를 수가 있는가,” 극우파, 네오나치주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그려내는 소설로 작가 역시 유대계 가정에서 자랐다.
곱씹을 만한 것이 많은 소설이다. 보스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선량한 헤르쉬트는 극단주의에 동원되는 시민을 은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헤르쉬트는 자기도 모르게 보스와 함께 네오나치의 일에 가담하지만, 그는 메르켈에게 오는 편지를 기다리거나 바흐의 음악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누구를 상대로 제국을 방어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도 관심이 없었으며, 다만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바흐 리허설만이 점점 중요해졌다,” 노벨위원회는 이 작품을 설명하며 “주인공 헤르쉬트는 속기 쉽고 마음이 넓은 아이, 도스토옙스키적 정신의 거룩한 바보(holy fool)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보스, 퀼러, 링어 등 헤르쉬트를 둘러싼 인물들이 의미하는 바와 그들이 가진 어리석음 등이 현시대의 모습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바흐, 늑대 머리, 앙겔라 메르켈, 네오나치, 양자물리학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만한 기호들이 여럿 흩뿌려진 소설이다. 책 속에서 세상은 점점 나빠진다. 폭탄 테러가 벌어지고 도심에선 전염병이 대유행한다. 이야기는 예측을 넘어 저 멀리 나아가는데, 작품의 마지막 헤르쉬트가 도달한 지점은 네오나치로 대표되는 차별과 폭력의 시대 우리가 겪을 또 다른 비극을 은유하는 듯하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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