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고문. 김 고문 제공 |
1980년 5월 전두환의 5·17 군사쿠데타 예비검속으로 상무대 영창에 갇힌 서른 두살의 김상윤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는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고, 노동자 농민이 혁명의 주력부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무대 영창에서 만난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닌 식당 종업원·구두닦이 등 사회 하층민이 많았다. 이른바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 의욕을 잃은 채 사회 주변에 떠돌다 언제든지 권력자에게 매수당해 노동자 혁명을 무산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김상윤이 만난 사람들은 당시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참혹한 현장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었다.
김상윤은 “어떻게 사회 밑바닥에서 홀대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접해준 적도 없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면서 저항할 수 있었을까. 책 몇 권 읽고 혁명가를 흉내 내던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배우자.’ 김상윤은 이듬해 석방되면서 이 말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는다.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이 자신의 시민운동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회고록 ‘50년 동안 흔들리며 배운 세상-나의 소박한 운동사’(작가와)를 펴냈다. 올해는 유신독재 시절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돼 1975년 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던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이 1975년 2월 광주교도소에서 나오고 있다. 김상윤 회고록 갈무리 |
회고 형식인 이 책은 투옥됐던 민청학련 사건과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던 5·18민주화운동 등 민주주의를 위한 행보보다는 시민들과 함께 광주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이면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은 내가 시민운동을 한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다. 훗날 내가 죽은 뒤 자녀들이 추억할 수 있도록 그동안 사회활동이랍시고 저질러온 내용을 소박하게나마 정리해봤다”고 말했다.
책 출간을 도운 조원탁 동신대 명예교수는 “이 책은 한 인물의 자서전적 기록이 아니라 광주라는 도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시민사회가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해 왔는지, 문화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서로를 살려왔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자료”라고 소개했다. 표지 그림은 재독작가 정영창씨가 맡아 광주의 트라우마를 응시하는 김 고문의 시선을 표현했고 삽화는 친동생이자 평생의 동지인 김상집 광주·전남 6월항쟁 이사장이 그렸다.
‘민청학련’ ‘5월 광주’ 두차례 옥고 뒤
지역에서 펼친 사회 활동 행보 담아
1999년 광주비엔날레 사무차장 맡고
시민단체 지역문화교류재단 설립
천동마을 윤상원기념관 개관 이끌어
“광주 미래 먹거리는 ‘문화기술’이죠”
전자책으로 발간한 책은 225쪽 분량으로 ‘1부 저항의 시대(1974-1982)’ ‘2부 세상을 배우는 시절(1982-2000)’ ‘3부 시민운동의 시절(2000-2020)’로 나눠 김 고문의 활동을 소개한다.
그는 1981년 12월25일 성탄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며 사회에 뛰어들었다. 그가 운영했던 녹두서점은 이미 폐쇄된 뒤였다. 어느 날 후배 이양현이 찾아와 “형님, 광주는 지금 정신적으로 폐허 상태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어 집단적으로 미쳐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굳세게 살아가는 모범을 보입시다”라고 말하며 사회운동의 의지를 다졌다.
재독작가 정영창씨가 그린 김상윤 초상화. 김상윤 회고록 갈무리 |
의료기기 사업으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1999년 5월에는 광주비엔날레재단 사무차장을 맡아 3회 행사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 광주 미술계는 김영삼 정부를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1995년 시작한 광주비엔날레를 환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김 고문은 광주 미술계와 시민단체를 오가며 갈등을 봉합했고 3회 행사를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다.
김 고문은 광주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문화로 봤다.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로는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2001년 말 의료기 사업을 정리하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04년 광주문화수도를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 때 호남학진흥원 설립을 위한 시민단체 ‘지역문화교류재단’(현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창설을 주도했다. 김 고문은 ‘비판과 감시’보다는 뚜렷한 목표를 지향하는 최초의 시민단체라고 평가했다. 2005년에는 지역문화교류재단 등 26개 단체가 참여한 ‘광주문화도시협의회’도 출범시켰다. 광주 미래 먹거리는 문화기술로 보고 ‘한국문화기술(CT)연구원’ 설립을 위해 10여년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 완성되려면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옛 전남도청은 ‘국립5·18기념관’으로 불러 광주를 국제적 인권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상원 기념관 설립도 그가 헌신했던 사업 중 하나였다. 기념관 설립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찾아다닌 일, 천동마을 주민들의 마을회관 기부, 하성흡 작가의 윤상원 일대기 그림 완성, 완공에 이르기까지 책을 통해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민청학련 배상금으로 광주 예술의거리의 한 건물을 구매해 설립한 ㈔광주마당은 그가 후배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활기를 잃은 한국민주주의전당 유치 활동,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사업은 아픈 손가락이다.
김 고문은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만들어지면 광주는 일자리가 넘쳐 날 것”이라며 “광주·전남이 통합하더라도 문화를 기반으로 미래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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