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한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판결 직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효진 기자 |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때문에 폐암 등 국민 건강에 심각한 피해가 생겼다”며 국내외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소송의 2심에서도 패소했다. 재판부는 “담배에 설계나 표시상 결함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기망·은폐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민사6-1부(재판장 박해빈)는 15일 공단이 담배회사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의 보험급여 지출은 보험법에 따른 의무 이행이고, 피고의 위법행위가 아닌 보험계약에 따른 지급”이라며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소송은 건보공단이 “흡연 피해 때문에 부담한 진료비를 담배회사가 물어내야 한다”며 2014년 4월 제기한 뒤 13년째 이어지고 있다. 공단은 폐암 중 편평세포암·소세포암·후두암 중 편평세포암을 진단받은 환자 중 담배를 20갑년(1갑년은 1년간 하루 1갑씩 흡연했을 때를 기준으로 한 담배 소비량) 이상 또는 30년 이상 피운 3465명에 대해 지급한 2003~2012년간의 건강보험 급여 약 533억원을 담배회사들이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단은 환자들의 권리를 대신 행사해 이들의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2020년 1심 판단 이후 5년여 만에 나온 2심에서도 법원은 담배회사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흡연과 폐암 발병의 인과관계에 대해 따로 판단하는 대신 대법원 판례를 들었다. 과거 흡연자들이 직접 KT&G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한 사건에서 2014년 대법원은 “개인이 흡연했다는 사실과 폐암 발생 사실이 증명됐다고 해서 그 자체로 둘의 인과관계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흡연자에 따라 흡연 기간과 폐암 발생 시기, 건강 상태, 가족력 등을 추가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이날 재판부도 “흡연과 폐암 발생의 역학적 연구결과는 통계적 차원에서 집단 내 질병 발생의 분포와 결정요인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며 “이 연구결과가 실제 개인의 질병에 대한 개별적 원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주진 않는다”고 했다.
공단은 담배회사들이 니코틴 함량을 줄인 담배를 제조해 의존성을 낮춰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어 환자들이 흡연을 시작한 1960~1970년대에 담배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경고가 없어 기망 행위를 했다고도 했으나 이 역시 기각됐다. 재판부는 “흡연자에 따라 니코틴 흡입량이 달라질 수 있어 의존성이 생기지 않는 기준을 설정하기는 어렵다”고 했고, “과거 신문기사와 논문 등을 살펴본 결과 오래전부터 담배 유해성과 중독성을 경고해 온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원고 패소 주문을 읽기 직전 “원고는 흡연자 3465명을 대상으로 요양급여 비용 명세서와 문진표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이들의 진단 내역을 개별적으로 조사했다. 항소심에서는 고도 흡연자 심층 사례를 제시하고,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 사무국의 서한까지 제출하기도 했다”며 “소송 당사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와 열정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어 “이 사건 대상자들이 흡연하던 1960년대부터 보험 급여를 마칠 때까지 사실관계를 토대로 판단이 이뤄졌는데,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며 판단 이유를 설명하고, “우리 사회에서 흡연에 대한 인식과 대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고, 이에 따른 정책과 기준이 향후 투입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선고 이후 정기석 공단 이사장은 기자들과 만나 “법원 판단을 존중하지만,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지금은 누구나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는 사실을 안다. 이 유해성에 대해 유보적으로 판단하는 건 정말 비통하다”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헌법상 기본권과 건강추구권이 무너지게 된다”고 했다.
☞ 건보 이사장 “수술 앞둔 사람도 중독성 때문에 흡연…담배회사가 책임져야”
https://www.khan.co.kr/article/202505221857001
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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