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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츠 알고리즘 시대… 왜 우리는 아직도 종이책을 넘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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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문학전문기자]

"종이책은 죽었다." 디지털 기기가 급속히 확산한 1990년대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온 '종이책 위기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출근길 지하철과 버스에서 종이책을 펼친 독자를 종종 만난다. 인기 도서는 도서관 예약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고, 동네 서점은 북클럽과 낭독회로 독자를 다시 불러 모은다. 왜일까.


디지털 시대에서 종이책은 낡은 유물이 아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 시대에서 종이책은 낡은 유물이 아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시대, 사람들은 왜 여전히 무겁고 비싸며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종이 뭉치를 갈망하는 걸까."


지난 11월 28일, 한국출판학회가 개최한 '제19회 출판전공 대학원 우수논문 발표회'에서 우수논문상을 수상한 이선주(성신여대 대학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씨는 논문 '종이책의 사회적 가치에 관한 미디어 생태학적 탐구'를 통해 이 오랜 질문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씨는 '미디어 생태학'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통해 디지털 미디어가 범람한 환경 속에서도 종이책이 단순한 정보 매체를 넘어 사회적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씨의 연구는 통계 분석에 머물지 않았다. 종이책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산자(저자), 매개자(편집자), 수용자(독자) 등 14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유튜브와 전자책, 종이책을 모두 경험한 이들의 진술로 매체별 차이를 포착했다.


연구는 디지털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종이책이 '감각의 안식처'로 작동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유튜브나 쇼츠 콘텐츠가 시각과 청각을 수동적으로 자극하며 정보를 흘려보내는 '스낵 컬처(Snack Culture)'라면, 종이책은 독자가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고 조명을 켜는 독서 의식을 치르게 한다. [※참고: 스낵컬처는 스낵처럼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즐기는 트렌드를 의미한다.]


인터뷰에 참여한 독자들은 종이책 읽기가 단순한 시각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자는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듣고, 종이 특유의 냄새를 맡는 등 오감을 통합적으로 활용한다.


이씨는 "종이책은 복잡한 디지털 미디어 속에서 감각이 둔화한 현대인들에게 침잠沈潛(깊은 사색)과 정화의 시간을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폰의 차가운 유리와 달리, 물성을 지닌 종이책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독자를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종이책 저자로 활동하는 이들의 인식 변화도 눈길을 끈다. 연구에 따르면, 수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들조차 자신의 영상이 알고리즘을 타고 소비된 뒤 금세 잊히는 휘발성 콘텐츠에 머문다는 한계를 느꼈다. 반면 종이책은 흩어진 콘텐츠를 하나의 완결된 물성으로 묶어 자신의 지적 활동을 유산으로 남기는 행위로 자리 잡았다.




한 저자는 인터뷰에서 "영상은 다 흘러가서 잊히지만, 책은 유산이 돼 남는다"라고 고백했다. 미디어 생태학자 해럴드 이니스(Harold Innis)의 이론에 따르면, 과거 무거워서 이동이 어려웠던 매체(돌ㆍ점토판)는 시간을 견디는 '시간 편향적' 성격을 지녔다.


이씨는 디지털 시대의 종이책이 이런 '시간 편향적 미디어' 성격을 다시 획득했다고 해석했다. 디지털 데이터는 삭제가 쉽고 포맷이 바뀌면 접근이 어려워질 수 있지만, 종이책은 물리적 실체로서 시간을 가로질러 지식을 보존하고 전승한다.


출판 현장의 최전선에 선 편집자들에게 종이책은 여전히 '원본'이다. 전자책은 그에 파생한 '복제본' 혹은 '그림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연구에 참여한 편집자들은 전자책 제작을 부차적 업무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고, 종이책 제작 과정에서만 엄격한 교정과 심미적 디자인 작업을 밀도 있게 수행했다.


종이책은 한번 인쇄하면 내용을 바꿀 수 없다. 높은 제작 비용도 편집자에게 완성도를 강하게 요구한다. 이 과정이 종이책에 '신뢰'와 '권위', 예술적 '아우라(Aura)'를 부여한다.


한 편집자는 품절 도서를 소량으로 디지털 인쇄(POD)해 판매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책의 존엄을 위해 오프셋 인쇄(Offsetㆍ평판 인쇄의 일종)가 아니면 찍지 않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종이책은 정보 전달 수단을 넘어, 만드는 이의 장인정신과 자부심이 응축한 물적 심미성의 결정체다.


독자들이 종이책을 소비하는 방식은 유튜브나 쇼츠 콘텐츠 소비 방식과 다르다. 유튜브 시청이 알고리즘 추천을 따라 수동적으로 흐르는 '표류'라면, 종이책 구매는 독자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며 서점이라는 공간을 탐색하는 '능동적 항해'다.

독자들은 종이책을 펼치면 '완독의 의무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비싼 비용을 지불했다는 경제적 이유도 작동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의 성취감과 책의 물성이 주는 압도감이 완독을 밀어붙인다. 파편화한 정보에 익숙해 긴 호흡을 유지하기 힘든 현대인에게 종이책은 사유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훈련장이자 지적 성취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선주씨는 논문 결론에서 종이책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종이책이 지닌 아날로그적 가치가 더 희소해지고 더 귀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환경으로서의 미디어를 상정하는 미디어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종이책이 디지털 뉴미디어의 틈바구니에서 구축한 인간 환경의 요지는 바로 '균형'입니다."


[사진 | 뉴스페이퍼]

[사진 | 뉴스페이퍼] 


현대인은 시각과 청각, 가벼움과 무거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씨의 연구는 종이책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균형자'라고 말한다. 종이책은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깊이 있는 지식, 정제한 문자, 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며 미디어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킨다.


이번 연구는 종이책을 '낡은 구세대 매체'로 치부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고 감각의 균형을 맞추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입증했다.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범람하는 알고리즘 시대, 우리가 여전히 서점을 찾고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는 이유도 선명하다. 우리는 '접속'을 넘어 '사유'를 원한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문학플랫폼 뉴스페이퍼 대표

lm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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