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푸른 파도 같은 바람이 밀려온다. 그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나인지 타인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생명체인지 착시가 드는 무대. 옷자락은 풀잎처럼 일렁이고, 민들레 홀씨가 돼 연기처럼 흩어진다. 시간을 건너온 어느 시대, 어떤 계절의 산물이 기어이 살아남아, ‘이윽고’ 오늘에 다다른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고자 했어요. 이를테면 씨앗 같은 거예요. 어쩌면 1만 년 전에도 살았던 바로 그 씨앗, 민들레 홀씨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인간 존재만이 가진 진정성을 말하고 싶었죠.” (길흥)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비트와 선율 위로 무용수들이 휘청인다. 속박에서 벗어나려 발을 구르고, 마침내 해방한 듯 한 꺼풀 한 꺼풀 옷자락을 걷어낸다. ‘이윽고’ 도달한 곳에서 안무가는 묻는다. 맹목적으로 달려온 시간의 끝에서 마주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그곳이 어디인지 질문을 던진다.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무대에 오른 휴먼스탕스의 ‘이윽고(INTIME)’다.
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의 안무가 길흥(조재혁)과 김시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휴먼스탕스(Humanstance)는 이름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태도(stance), 혹은 저항(resistance)을 몸짓으로 풀어내는 무용 단체다. 지난 10년간 ‘한국 춤’의 본질을 지키며 동시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실험을 이어왔다. ‘이윽고’는 열한 살이 된 휴먼스탕스가 집요하게 물고 온 오랜 실험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돌’의 단단함을 지나 ‘신, 시나위’의 영성을 거쳐 ‘이윽고’라는 시간의 항로에 선 그들의 오늘을 보여준다.
최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휴먼스탕스 예술감독 길흥(본명 조재혁)은 이 작품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며 예술도 디지털화하고, AI(인공지능)화 되는 시대의 춤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 안에 담아냈다.
인간만이 가진 오묘한 신비, 가장 순수한 진정성
‘이윽고’는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작품이다. ‘AI 대전환기’에 인간만이 말할 수 있는 것, 예술이 담을 수 있는 가치를 모아 무대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길흥은 “지구가 탄생한 이래 가장 훌륭한 피조물은 인간은 아닐지 생각한다”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안의 신비하고 오묘한 무언가를 표출하는 것이 예술이고, 춤은 그 어떤 단계를 거치지 않는, 가장 순수하고 진정성을 가진 장르”라고 했다.
한국무용을 기반으로 ‘오늘의 관객’과 호흡하는 휴먼스탕스의 춤은 호흡과 선, 정서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는 “한국 춤은 보이지 않는 기운을 다루는 영적(Spiritual)인 영역에 속한다”며 “지금은 한국무용 역시 현대무용에 가깝게 진화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결코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영적인 춤이라는 본질”이라고 했다.
휴먼스탕스 ‘돌’ [휴먼스탕스 제공] |
‘이윽고’ 역시 이 안에서 태어났다. 이 무대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2024년 11월, 시범 공연으로 세상에 나와 ‘창작산실’에 선정돼 긴 시간의 서사를 함께 쌓았다. 사실 ‘창작산실’은 예술가에게 ‘양날의 검’이다. 탄탄한 지원을 통해 안정적 제작 환경을 제공받지만, 공연예술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무대로서 가능성을 타진하는 플랫폼인 만큼 예술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 ‘시험대’로도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 무대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동작의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녹였다. 무용은 연극, 뮤지컬 등 다른 장르에 비해 ‘대중성’을 입기가 쉽지 않지만, ‘이윽고’는 한국 춤의 손짓과 보법이 진화하듯 ‘오늘의 춤’과 만나 쉽게 펼쳐져 굳이 스토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휴먼스탕스가 춤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독특하다. 안무가 길흥은 하나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면서도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다운 춤’을 끌어낸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그는 무용수들에게 민들레 씨앗이 날리는 회전의 몸짓,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의 질감 같은 추상적인 미션을 던졌다. 화려한 테크닉 이전에 날것 그대로 진실함을 끄집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길흥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무용수 김시원은 “형은 무용수를 빛나게 하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가졌다”며 “무용수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멋을 깨워주는 안무가”라고 말했다. 무용수를 도구화하지 않으면서 ‘본연의 멋’을 깨워준다는 것이다.
“연습 과정에선 저는 잘 보지 못했던 무용수의 강점을 형이 끌어내는 것을 보게 돼요. 무용수가 가장 빝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동작이나 장면을 표현할 때, 처음엔 잘 안될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저 친구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어 감탄할 때가 많아요.” (김시원)
역풍을 순풍 교차한 투혼의 연대기…‘절친의 교감’
두 사람은 무용계의 유명한 절친이다. 2018년 첫 작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17세의 나이 차가 느껴지지 않는 예술적 동반자다. 엠넷 ‘스테이지 파이터’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김시원은 그의 곁에서 무용수로 춤을 추고, 조안무로 창작의 날개를 펴고 있다.
길흥은 김시원에 대해 “순수하고 꾸밈없다. 예술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할 수 있는 유일한 동료”라고 말한다. 둘은 작업이 없을 때도 사적으로 만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일상에서 수많은 대화를 통해 작품의 씨앗을 틔운다.
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의 안무가 길흥(조재혁)과 김시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길흥은 김시원이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걷는 길에서 만난 멘토다. 툭툭 주고받는 짧은 대화 안에서 명언이 쏟아진다. 김시원이 곰팡이가 피어나는 집에 살던 때였다. 길흥은 김시원에게 “삶은 파도와 같으니, 바닥을 칠 때 준비하면 반드시 다시 올라갈 파도를 타게 된다”고 했다. 이 말은 김시원이 지금도 품고 있는 삶의 지침이다. 두 사람의 깊은 정서적 유대는 ‘이윽고’의 무대로 이어진다. 단순한 안무의 수행을 넘어 영혼의 교감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무대가 완성되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멤버들의 결혼, 바쁜 해외 일정 등 예기치 못한 ‘역풍’이 몰아쳤다. 길흥 안무가는 공연을 앞두고 급하게 허리 수술도 받았다. 심각한 디스크로 인해 발가락조차 움직이기 힘든 고통으로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공연을 불과 2주 앞두고 퇴원해 연습실로 복귀했다.
그는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 같다”며 “‘이윽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도 작품의 제목을 따라가는 운명이었다”며 웃었다. 이 안에서도 그는 의미를 캐냈다. 역풍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홀씨’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피어났다.
“인류는 완성의 단계로 가고 있지만, 한편으론 진정성을 잃고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의 육체적 고통 역시 소멸의 과정에 다시 한번 진정성과 소통해야 한다는 작품의 메시지로 이어지더라고요.” (길흥)
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양자역학의 움직임을 만든 ‘한국춤의 진화’
안무의 핵심 메소드는 ‘양자역학적 움직임’이다. 길흥은 물리학적 개념을 무용수의 신체에 대입해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시각화했다. 한국 춤이 가진 최고의 미덕인 ‘호흡’이 안무에서 잘 살아났다. 길흥은 들숨과 날숨을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정의해 수축과 이완으로 표현했다. 무용수들의 몸이 굽어지고 펴지고, 작아지고 늘어나는 과정과 단계는 무수히 많은 ‘숨’의 형상화였다.
한국 춤을 동시대 춤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그래왔듯 ‘이윽고’ 역시 ‘선형적 구조’를 벗어났다. 정적인 선율 속에 흐르던 춤이 테크노 비트에 숨겨진 ‘반복의 미학’을 탐구하며 청각적,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서로 다른 극적인 차원을 오가는 것은 우리 삶에 순풍과 역풍이 교차하며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과 같다고 무대는 말한다.
‘이윽고’는 4개의 장이 유기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완성의 단계, 그 과정에서 소멸의 공포, 마침내 마주하는 본연의 모습을 그려낸다. 순풍과 역풍이 교차하는 시간의 무게를 딛고 마침내 막이 오른 것처럼, 무대에서도 질곡의 시간을 지나 ‘이윽고’ 어딘가로 도달한다. 김시원은 “누군가에겐 1장이 처음이나, 누군가에겐 4장이 과거일 수도,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다”고 했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이는 언제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휴먼스탕스 신작 무용 ‘이윽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무대에선 무용수들을 보는 재미도 탁월하다. ‘스테이지 파이터’로 입증한 노련함과 섬세함으로 무용수 김시원은 무대를 삽시간에 장악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도 ‘사제 인연’으로 알려졌던 박준우는 ‘이윽고’ 무대의 ‘명품 조연’으로 나섰다. 김시원이 춤의 깊이와 정서적 중심을 잡는다면, 박준우는 기술적 활력과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무용수들은 각기 다른 춤선과 표현력으로 작품 안에서 한 사람의 무용수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제작 과정의 ‘역풍’은 이들이 ‘순풍’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되며 작품의 서사와 평행이론을 이루게 됐다.
무용계의 오랜 절친인 두 사람의 모든 대화는 언제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로 귀결한다. 길흥은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위치에 올라가서도 망각하지 않는 본연의 마음”이라 강조한다. ‘이윽고’는 그 질문에 대한 몸의 답변이다. 역풍이 휘몰아칠지라도, 무대는 희망의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곳이 두 사람이 ‘이윽고’ 도달하고 싶은 곳이다.
“시궁창 같은 삶에서도 빛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통스러운 삶과 인간을 통해서도 희망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제 춤의 방향이에요.” (길흥)
“우린 결국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고통일지라도, 그 끝이 ‘살자’였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선함을 위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저희가 닿고 싶은 지점이에요.” (김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