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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창] 고려인 3세 미술 거장 문 빅토르 "광주가 마지막 안식처"

연합뉴스 박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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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문빅토르 미술관' 개관…정체성 잇는 문화 교두보 기대
'5·18' 주요 인물과 광주 출신 독립운동가들 초상화 작업 준비 중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문빅토르 화백(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작업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문빅토르 화백. 2026. 1. 12. seva@yna.co.kr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문빅토르 화백
(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작업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문빅토르 화백. 2026. 1. 12. seva@yna.co.kr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우리는 자기 고향이 없죠. 기차를 타고 땅 위를 달리지만, 사실은 땅 안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거예요. 언제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떠돌아야 했던 우리 고려인들은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12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에서 만난 문빅토르(74) 화백의 눈동자에는 카자흐스탄의 거친 바람과 고려인의 시린 역사가 동시에 머물러 있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이자 대표적인 한인 미술 거장인 그는 이제 유랑의 삶을 접고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 그중에서도 자신의 뿌리가 닿아 있는 광주에 안착했다.

고려인마을이 마련해준 그의 작업실 겸 거처에는 캔버스 위로 무수한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강제 이주의 비극을 상징하는 기차부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고려인의 얼굴들까지. 문 화백과의 대화에서는 그가 평생을 바쳐 그려온 작품 세계와 고려인으로서의 삶의 궤적이 묻어났다.

문 화백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외벽에 걸려 있는 설치작품 '하늘을 날으는 이주열차'다. 1937년, 영문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내몰렸던 고려인들의 고통을 벗어나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고려인들의 소망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문빅토르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주열차'(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외벽에 설치된 문빅토르 화백의 대표적인 작품 '하늘을 날으는 이주열차'. 이 작품은 1937년 강제이주라는 깊은 역사의 터널을 지나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고려인들의 소망을 담았다. 2026. 1. 12. seva@yna.co.kr

문빅토르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주열차'
(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외벽에 설치된 문빅토르 화백의 대표적인 작품 '하늘을 날으는 이주열차'. 이 작품은 1937년 강제이주라는 깊은 역사의 터널을 지나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고려인들의 소망을 담았다. 2026. 1. 12. seva@yna.co.kr


"작품 속 기차에 창문을 그려 넣은 것은 그것이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증조부 때부터 러시아에 정착해 살았지만 우리는 늘 떠나야 했죠.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어도 독립 후 거세진 민족주의 정책은 우리를 다시 이방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우수한 의사와 과학자도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현실 속에서, 고려인의 운명을 열차에 투영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각성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TV로 지켜보며 시작됐다. 1989년 처음 방문한 서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 달간 머물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만 접했던 우리에게 한국의 발전상은 기적 같았죠." 이 경험은 그가 강제 이주라는 무거운 주제를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는 계기가 됐다.


문 화백의 화풍을 상징하는 독특한 점묘법(Pointillism)은 역설적으로 생사의 고비에서 완성됐다. 심장 수술 후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작은 종이에 점을 찍으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다.

"누워 있을 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작은 붓으로 점을 하나하나 찍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더군요. 프랑스에서 시작된 전통 기법이지만, 저에게 점은 고려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이자 끈질긴 생명력과 같습니다."

그의 붓끝은 역사적 인물들에게도 향했다. 특히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던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에는 문 화백의 유감이 깊게 서려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강제 이주 후 러시아 정부의 행정 탓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던 장군의 분노를 그렸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 우리 영웅에 대한 헌사였죠."

홍범도 장군 초상화 배경으로 포즈 취한 문 화백(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작업실에서 홍범도 장군 초상화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문빅토르 화백. 이 작품은 고려인마을 홈페이지에 경매가 200억원에 올라와 있다. 2026. 1. 12. seva@yna.co.kr

홍범도 장군 초상화 배경으로 포즈 취한 문 화백
(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작업실에서 홍범도 장군 초상화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문빅토르 화백. 이 작품은 고려인마을 홈페이지에 경매가 200억원에 올라와 있다. 2026. 1. 12. seva@yna.co.kr


고려인마을 홈페이지에 경매가 200억원에 올라 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홍 장군의 공적을 기려 훈장 14개를 가슴에 그려 넣었다.

그가 광주에 정착한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1994년 그림 20여 점을 들고 무작정 한국을 찾았던 그는 우연히 광주 금호문화재단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고, 모든 작품이 매진되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광주에서 '문바위'를 찾았습니다. 제 성씨인 문(文) 씨의 시조 묘역과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제 뿌리가 이곳 광주에 있음을 확신했죠. 1886년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이주했던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했을 고향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3년 전 카자흐스탄에서 잘못된 무릎 수술로 고생하던 그는 한국 의료진과 이천영 광주 고려인 마을 이사장을 비롯한 동포들의 도움으로 재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자신을 품어준 광주 고려인마을에 보답하기 위해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2월 고려인마을에 문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식적인 '문빅토르 미술관'이 문을 연다. 1층은 갤러리, 위층은 작업실로 꾸며져 방문객들이 고려인의 역사를 예술로 체험하는 공간이 될 예정이다.

캔버스에 작업하는 문빅토르 화백(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26. 1. 12. seva@yna.co.kr

캔버스에 작업하는 문빅토르 화백
(광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지난 12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26. 1. 12. seva@yna.co.kr


"내 그림이 카자흐스탄에 남겨지면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국에서는 고려인의 역사가 됩니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주요 인물들과 광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노동자로만 인식되는 고려인의 이미지를 품격 있는 예술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는 젊은 고려인 후손들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돈만 벌 뿐, 한국어와 역사를 배우려 하지 않는 태도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매일 한두 마디라도 공부하면 1년이면 말을 잘 할 수 있어요. 언어를 알아야 자신의 뿌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문 화백은 캔버스에 다시 점을 찍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작품이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그가 찍는 무수한 점들은 이제 흩어진 고려인의 역사를 광주라는 도화지 위에 하나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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