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튜즈데이' 스틸 컷 |
서구의 오랜 문화적 상상력 속에서 죽음의 안내자는 줄곧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낫을 든 사신(Grim Reaper)으로 그려져 왔다. 무섭지만 위엄 있는 절대자의 모습이었다. 대이나 O. 푸시치 감독의 영화 '튜즈데이'가 그려낸 형상은 다르다. 깃털은 듬성듬성 빠져 있고, 몸에는 오물이 묻어 있으며, 쉰 목소리로 사람들의 비명을 흉내 내는 늙고 병든 금강앵무다.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린 10대 소녀 튜즈데이(롤라 페티크루)와 그녀의 엄마 조라(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 어느 날 튜즈데이 앞에 금강앵무가 날아와 죽음을 알린다. 그런데 이 사신, 어딘가 짠하다.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 탓에 만성 두통과 피로를 호소한다.
영화는 죽음의 안내자를 공포의 대상보다 우주의 거대한 순환을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고단한 노동자'로 조명한다. 소녀에게 금강앵무는 삶을 약탈하러 온 침입자가 아니다. 고통을 끝내주러 온 '마지막 친구'다.
갈등의 축은 남겨질 자인 조라다. 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가구와 책을 팔아치우고, 현실을 부정하며 거리를 배회한다. 집에 돌아와 금강앵무를 목격한 그녀는 극단적인 일을 벌인다. 금강앵무를 단숨에 제압하고는 산 채로 씹어 삼킨다.
영화 '튜즈데이' 스틸 컷 |
'문라이트', '미나리' 등으로 할리우드 미학의 최전선을 증명해온 제작사 A24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개다.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상실을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끝에 찾아오는 필연적인 수용을 묵직하게 그려낸다.
기괴한 '섭식' 행위는 인문학적으로 부정의 시각화이자, 소유욕의 극단적 발현이다. 조라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신의 섭리조차 뱃속에 가두어 통제하겠다는 광기를 보인다. 그 이면에는 사회학적 비극이 깔려 있다. 경제적 파산과 '독박 돌봄'으로 소진된 그녀에게 딸의 죽음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다. 어렵게 지탱해온 자신의 세계가 붕괴하는 재난과 같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고립된 개인에게, 품위 있는 작별은 사치일 뿐이다.
조라가 죽음을 삼키자 세상의 질서는 무너진다. 아무도 죽지 않지만, 아무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 속 티토노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영생(永生)을 얻으나 영원한 젊음은 허락되지 않아, 죽지 못한 채 늙어가는 고통 속에 갇힌다. 세상은 곧 죽음이라는 출구가 봉쇄된 생지옥으로 변모한다. 고통받는 환자들은 영원히 신음하고, 부패한 생명체들은 무한히 증식해 세상을 뒤덮는다.
푸시치 감독은 아비규환을 통해 현대 사회가 외면해온 '유한성(Finitude)의 가치'를 역설한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문장이 의미를 잃고 비문(非文)이 되듯, 죽음이라는 결말이 거세된 삶은 존엄이 아닌 형벌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영화 '튜즈데이' 스틸 컷 |
이 묵직한 주제를 풀어내는 화법이 친절하지만은 않다. 특히 금강앵무가 거대해지거나 엄마가 새를 삼키는 장면 등은 조악하고 기괴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낯선 껍질을 벗겨내면, 영화가 품은 미덕은 더없이 명징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현대 사회에 진정한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놓아주는 용기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혹은 이미 보낸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는 아프지만 필요한 예방주사다.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닌 완성이라는 사실을, 금강앵무의 쉰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끝내 움켜쥐려던 아집을 비워낼 때, 비로소 우리는 상실 이후를 다시 살아갈 '숨구멍'을 얻게 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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