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제미나이 |
영국에서 사설탐정을 고용해 스토킹과 괴롭힘을 ‘외주화’하는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며 제도적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설탐정에 대한 면허 제도나 자격 요건이 없는 영국의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가정폭력 가해자나 스토커들이 전문 인력을 동원해 피해자를 추적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1일(현지시간) 지난 3년간 최소 30건의 사건에서 스토커들이 사설탐정을 고용해 감시와 미행, 정보 수집을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가운데 일부 사례에서는 사설탐정이 가정폭력을 피해 도피한 여성들을 가정폭력 보호시설까지 추적한 사실도 드러났다.
영국에는 사설탐정에 대한 공식 면허나 등록 제도가 없어서 자격 검증 없이도 탐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다수 업체는 ‘배우자 외도 조사’를 주요 업무로 내세우고 있으나, 이러한 서비스가 폭력적 관계를 끊고 도망친 피해자 추적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사례를 보면 피해 여성들은 이혼이나 별거 이후 스토킹이 본격화됐다고 증언한다. 가해자는 휴대전화 위치 추적 서비스에 가입하거나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설탐정에게 비용을 지급해 미행과 사진 촬영을 의뢰했다. 법원에서 스토킹 방지 명령이나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뒤에도, 가해자가 직접 행동하지 않고 제삼자를 고용했다는 이유로 사설탐정은 수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외주형 스토킹’은 피해자에게 이중의 공포를 줄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심리적 충격이 크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 조치마저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호시설 관계자들은 “쉼터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공간”이라며 “이곳까지 노출되는 순간 피해자는 다시 극단적인 위험에 놓인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일부 사설탐정 업체들은 공개 데이터베이스나 상업용 정보망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피하고 있으며, 경찰과 감독 당국 역시 명확한 위법성을 입증하지 못해 제재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사설탐정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는 전직 경찰, 20%는 전직 군인이었다. 수년, 수십 년간 사람을 추적하고 위치를 파악하는 훈련을 받은 인력이 민간 시장으로 이동해, 개인을 감시하는 데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난민·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 ‘레퓨지’의 에마 피커링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훈련된 기술이 취약한 여성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명백한 구조적 문제”라고 비판했다.
업계 내부에서도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 사설탐정들은 의뢰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요청 사유를 검토하는 내부 절차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객의 범죄 이력이나 법원 명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공식 수단은 없다. 이로 인해 접근금지 명령이나 스토킹 방지 명령을 받은 가해자조차 사설탐정을 고용할 수 있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2013년 영국 정부는 사설탐정 면허제 도입을 예고한 바 있지만 10년이 넘도록 해당 제도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설탐정을 통한 스토킹이 단순한 사생활 침해를 넘어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사설탐정을 고용한 뒤 발생한 살인·중대 범죄 사례도 보고되고 있지만, 사설탐정이 형사 책임을 진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23년 영국에서 한 60세 남성이 아내가 불륜 행위를 했다고 의심해 사설탐정을 고용해 위치를 추적했다. 이후 그는 아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피해자는 가디언에 “가해자가 직접 하면 불법인데 돈을 주고 대신시키면 가능해지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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