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하는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 대표를 향해 ‘개인정보 유출 김범석이 책임져라’ 는 등의 문구가 적힌 손 펼침막을 들고 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
경제활동 인구보다 많은 3370만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하고도 무책임하게 나오는 쿠팡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가 거세다. 미국에 본사를 둔 쿠팡이 미국 투자자와 한국 소비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 기업의 잘못을 바로잡고 예방에 투자하게 하는 집단소송 같은 사후제재가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 증거개시(디스커버리)는 실효성 있는 소비자 피해구제 ‘3종 세트’로 불린다. 집단소송은 피해자 중 일부가 승소하면 그 효력이 피해자 모두에게 미치는 제도다. 최대 수천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에게 조 단위의 배상을 할 수도 있어 기업이 두려워한다. 특히 기업들은 소송 중 증거개시로 이메일 같은 민감한 자료까지 공개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미국에서는 이 때문에 거액의 배상을 약속하며 피해자와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두려움이 있어야 정보보안에 투자하고 소비자 보호에 노력한다는 게 강력한 사후제재의 목적이다.
쿠팡과 에스키에티(SKT) 사태를 계기로 소비자 피해 구제를 실효성 있게 해야 할 필요성이 환기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2일 국무회의에서 “잘못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여야 한다”며 과징금 강화와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주문했다. 최근 정부가 기업 범죄에 대한 형사처분을 줄이고 민사적 규율을 늘리기로 해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11일 현재 국회에는 오기형, 김남근, 이학영, 백혜련, 전용기, 박주민 의원 (이상 더불어민주당)과 차규근 의원 (조국혁신당) 이 집단소송제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한데, 이런 움직임이 처음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배배상제 확대 도입을 국정과제로 삼고 2020년 9월 입법 예고까지 했으나 도입이 무산됐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반대가 완강했다. 그나마 있는 제도 마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2005년 증권 분야에 한정해 도입된 집단소송은 피해자가 기업의 잘못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증거개시제 등이 없어 20년간 단 12건의 소송이 제기됐고, 의미 있는 원고 승소는 6~7건에 그쳤다. 이번에도 흐지부지되지 않으려면 반대를 뒤집는 논리와 정교한 제도 설계, 소비자의 관심과 지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식 집단소송제를 모델로
발의된 법안은 미국의 집단소송제를 뼈대로 한 게 많다. 분야 제한 없이 다수의 피해자(50인 이상 등)가 발생한 기업의 불법행위에 포괄적으로 적용한다. 소송에서 빼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든 피해자에게 판결의 효력이 발생 (제외신고형) 한다. 이번에는 개인정보 침해 분야로만 확대하자는 법안도 있다. 피해자가 직접 소송을 내는 미국식 집단소송과 공익단체가 먼저 소송을 제기하고, 기업의 책임이 인정되면 2단계로 피해자가 채권신고를 해 구제받는 단체소송으로 유형이 나뉜다. 기업의 고의적인 불법 행위, 배상지연 등 중대한 위법에 대해 피해액의 3~5배까지 징벌적 배상을 부과하는 방안도 담고 있다. 또 기업이 가진 정보에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피해자가 입증 부담을 덜 도록 증거개시제도를 함께 도입하는 법안이 대부분이다.
재계는 또 강력 반대?
기업을 대변하는 대한상공회의소나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지난 주 “아직 검토하지 않아 의견이 없다” 고 밝혔다. 미리 반대하고 나서 욕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안의 윤곽이 드러나면 그때는 움직일 것이다. 대략 2020년에 낸 논리의 연장선에서 반대 의견을 밝힐 전망이다. 당시 대한상의는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가 함께 도입되면 기획소송, 연쇄 도산이 확산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변호사만 좋고, 기업은 소송 남발로 골병들고 △형사처벌, 과징금, 행정제재에 더해져 가혹한 중복처벌이며 △증거개시로 기업비밀 유출과 악성 소송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타당성도 있지만 과장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제도를 우리만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다. 38개 경제협력기구 회원국 중 집단적 금전배상 제도가 없는 곳은 한국과 튀르키에 뿐이다. 소송 남발이라지만, 법원의 소송 허가를 받아야 하고, 본 소송에서 패소하면 상대방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줘야 해 문턱이 절대 낮지 않다. 김주영 변호사 (한누리)는 “지금 쿠팡을 상대로 여러 건의 소송이 제기됐는데, 집단소송이 있다면 한데 모아서 소송하는 것이라 사법 자원을 절약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집단소송은 실효성 있는 피해구제 소송이 어려워 기업이 예방 투자를 게을리하는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제도인 셈이다. 증거개시제 역시 이런 소송에서 기업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최소한의 균형 장치라는 것이다.
정교한 제조 설계가 핵심
피해구제 제도가 작동하려면 기업에 경각심을 주면서도 부작용을 줄이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재계 반대론에 밀려 ‘차 떼고 포 떼고’ 도입하면 ‘허당’ 이 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 꼴이 난다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집단소송 외에 유럽식 단체소송 같은 대안도 검토할 만하다. 국회입법조사처 박소영 입법조사관은 “집단소송이 발달한 미국에서도 피해자 범위를 정하고 손해배상액을 판단하는 작업이 매우 복잡해 사건마다 첨예한 쟁점이 되고 소송이 장기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쿠팡 공동소송을 이끄는 이은우 변호사(지향)는 “미국식 집단소송에 대한 재계의 우려가 큰 만큼, 유사한 효과를 내는 유럽식 단체소송을 모델로 한국형 제도를 설계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이 독일 자동차회사의 ‘디젤 게이트’ 가 터진 뒤 2020년 제정해 시행하는 단체소송은 자격을 갖춘 소비자 단체 등으로 소송 주체를 제한하고, 승소하면 전체 피해자가 혜택을 보는 제도이다. 소송 남발을 막으면서 피해 보상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드물게 적용되는 징벌적 배상제를 집단소송과 묶어서 적용하는 게 과도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예로 쿠팡 피해자에 집단소송으로 10만원씩만 배상해도 3조4천억원이 들어가 쿠팡의 자기자본이 대부분이 날아간다. 집단소송 도입이 법리적,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면 정부의 과징금을 기금화해 피해자 구제에 쓰는 ‘공중피해보상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이 함께 도입되면 중복처벌 가능성이 있는 만큼 과징금 제도는 정비할 필요가 있다. 소송허가 3심, 본 재판 3심으로 사실상 6심제인 것도 손봐야 한다. 허가심의 시한을 정하거나 원고만 항고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얘기된다. 무엇보다 최종 관문인 법원의 인식 제고와 역량 향상이 함께 따라야 한다. 전문 재판부가 없어 업무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재판이 늘어지는 것도 문제이다.
시민의 요구를 추진력으로
국회는 당정협의를 거쳐 단일안을 만들고 공청회 등을 열 예정이다. 사법개혁, 3차 상법 개정 등 현안이 많아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 그 사이 쿠팡으로 끓어오른 사회적 분노가 잠잠해질 수 있다. 기업은 대관 조직을 가동한 로비와 우호적 언론을 통한 반대 여론전에 나설 것이다. 2005년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도입 시 허가심에 항고권을 달라는 기업의 요구를 수용해, 소송을 사실상 6심제로 만들어 버린 사례는 반면교사이다. 김남근 의원은 “정부가 형사처벌을 줄이는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그런 취지에 맞춰 민사적 책임을 제대로 묻고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며 “이번에 집단소송을 도입하지 못하면 경제형별 합리화는 기업 봐주기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진적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라는 1400만 개인 투자자의 요구가 상법 개정의 동력이 되었듯이 개인정보 유출로 높아진 소비자의 경각심을 제도개선의 추진력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오기형 의원(민주당 코스피 5000 특위 위원장)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상법개정도 사회적 에너지가 있기에 돌파할 수 있었다”며 사회적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