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이 터지기 불과 열흘 전. 1950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여간첩 김수임 재판은 장안의 최대 화제였습니다. 김수임이 법정에 출석하는 사진, 법정 안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보도됐습니다. 법정의 김수임은 하늘빛 모시 적삼에 짙은 보랏빛 비로드 치마를 입었고 흰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모습이었다고 당시 신문들은 보도했습니다. 당대의 여류 시인 모윤숙도 증인으로 나와 친구 김수임이 애정에 이끌려 남로당 이강국에게 이용당했다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불린 여간첩 김수임은 누구일까요. 어떤 일을 벌인 것일까요. 그리고 김수임과 그의 애인 이강국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김수임은 1911년 경기도 연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겨우 열한 살 때 남의 집 민며느리로 팔려가다시피 열다섯 살 신랑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신랑의 횡포를 못 이기고 가출했다가 미국인 독신 여성의 양녀가 됐고,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동대문여학교를 나온 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 이화여고)를 졸업했습니다. 1928년 3월 17일 자 조선일보는 이화여고보 우등 졸업생 3명의 명단을 실었는데 김수임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어 김수임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까지 졸업했습니다. 한 해 10명 남짓 졸업생을 배출하던 이화여전을 나온 것만으로도 여류 명사 반열에 오르던 때였으니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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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조선일보는 이화여전을 졸업하는 김수임의 인터뷰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김수임이 스스로 말한 어린 시절은 훗날 밝혀진 것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무남독녀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갓 젖을 뗀 아기가 불쌍해서 어느 부인이 수양딸로 키우고 여학교에 입학시켰다. 3학년 때 수양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자 선생님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켜줬고, 이후 교회의 보조를 받게 돼 이화전문학교까지 8년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졸업하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김수임은 “집과 같은 학교를 떠나게 돼 섭섭하고 막연하지만, 아직 구체적 장래 계획은 없고, 학창 시절에는 어학에 취미를 가지고 정신을 기울였다”고 말했습니다. 가족이 없는 김수임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방학에도 기숙사에서 외롭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밝은 성격이었고 늘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동창들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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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은 졸업하자마자 경성 문화계의 셀럽으로 활약했습니다. 현대 연극의 효시인 극예술연구회 창립 멤버였고, 여러 차례 공연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극예술연구회를 주도한 유치진 씨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여배우가 모윤숙, 노천명, 김수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당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이기도 한 모윤숙, 노천명과 어울려 다닌 20대 김수임은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동정이 실리고, 신문사 좌담회에 참여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여류 명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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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모윤숙은 김수임과 이화여전 4년간 같은 기숙사 방을 쓴 절친이었습니다. ‘선량하고 유쾌하고 솔직하고 단순하고, 불우한 환경에도 늘 성적이 좋았고, 웃음을 잃지 않아 귀여운 여인으로 불리었다’는 것이 김수임에 대한 모윤숙의 회고였습니다. 당시 김수임의 직업은 세브란스 병원 통역사였습니다. 미국인 치과 과장인 부츠 박사의 통역사 겸 비서로 부츠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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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의 황금기였던 1930년대가 지나고 1940년대로 접어듭니다.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김수임은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30대가 됐습니다. 이때 김수임은 문제의 이강국을 만나게 됩니다. 1942년 4월 친구 집에서 만난 이강국은 1906년생으로 김수임보다 다섯 살 위인 36살이었습니다.
이강국은 경기도 양주의 몰락한 양반 집 출신으로 머리가 좋아 1925년 보성고보를 우등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진학했습니다. 부잣집인 처가의 도움으로 1932년 독일 베를린대로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자가 됐습니다. 귀국 후 공산당 활동을 하다 1938년 체포됐다가 1940년 보석으로 풀려 나온 뒤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부남이었던 이강국에게 김수임은 빠져들었습니다. 집을 팔아서 집 판 돈을 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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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후 남로당이 정국 주도권을 잡고 위세를 떨치자 이강국도 전성기를 맞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조직부장으로, 박헌영의 8월 테제 작성에 관여하면서 박헌영의 심복이 됐습니다. 남로당이 전국 조직과 돈줄까지 장악하고 있던 시절,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신부장 직무대리, 중앙인민위원회 서기로 있으면서 박헌영의 수족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김수임은 미군정청의 통역관으로 채용됩니다. 훗날 검찰 조사에서 김수임은 당 사업을 위해 미군정청에 들어가 달라는 이강국의 요청으로 미군정에 들어간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미군정청과 가까운 반도호텔(현 명동 롯데호텔 자리)은 미군 장교들의 숙소와 회합 장소로 사용됐습니다. 김수임은 반도호텔 지배인 같은 역할을 하면서 미군 고위 장교들과 교류했습니다. 김수임은 영어에 능통하고 이화여전 출신 인텔리인 데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미국인들과 일하며 서구적 매너가 몸에 배 있었습니다.
게다가 천재적인 사교술을 가진 김수임은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했고, 급기야 주한 미군 헌병사령관이자 경찰 최고 고문관인 존 베어드(John Baird) 대령과 동거해 아이까지 낳는 사이가 됐습니다. 베어드 대령을 쥐락펴락한 김수임의 위세는 대단했고, 김수임의 전화 한 통이면 고관이 파면돼 버릴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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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위조지폐를 찍어낸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남로당은 기세가 꺾입니다. 수뇌부인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잠적해 행방이 묘연하던 이강국은 1946년 9월 18일 밤 9시 평양방송에 버젓이 출연하면서 월북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김수임의 집에 숨어 있던 이강국을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의 승용차로 당시 남한 땅이던 개성까지 데려다 준 덕분에 월북에 성공한 것입니다. 김수임은 이강국을 의사로 가장시킨 뒤 어머니가 위독해 의사를 모시고 간다며 호송해 주고 돌아왔습니다.
이강국은 이후 김수임을 이용해 대남 공작을 벌입니다. 미군정의 심장부에 자신의 애인이 있다는 것은 이강국에게 어마어마한 무기이자 뒷배였을 것입니다. 이강국은 김수임에게 결국 한반도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이고, 자신은 김수임과 결혼할 날만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김수임은 자기 집을 남로당 간부들의 아지트로 사용하도록 해줬습니다. 이강국의 연락원 신태희를 자기 집에 숨겨주며 이강국의 편지를 받고 커피와 미제 담배 등을 이강국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12월에는 이강국이 남로당 활동 자금으로 보낸 일본은행권 수억 원을 개성에서 서울까지 짚차로 운반하도록 도와줬습니다. 남로당 간부를 숨길 수 있도록 주택 구입 자금 100만원을 자신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자 남로당원인 최만용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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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자 남로당은 결정적 타격을 입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군경의 수사 계획을 남로당이 먼저 알아차려 실패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수사 당국은 기밀 누설의 근원이 고위 관리의 측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49년에는 남로당 중앙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이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는데 호송 중 탈옥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윗선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김수임은 이중업 탈옥을 지원하고 자기 집 2층에 숨겨 줬습니다. 동거하는 존 베어드 대령은 이중업이 김수임의 친척인 것으로 알고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일마저 있었습니다. 나중에 군 검찰의 최종 기소에서 이 내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누락됩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습니다. 서울시경 사찰과가 모 경위를 통해 김수임이 남로당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서울 옥인동 19번지 김수임의 집(옛 이완용 저택) 주변에는 정보원이 배치됐습니다. 그러나 김수임의 집은 밤마다 고관과 저명 인사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춤을 추던 사교 장소였고, 2층에는 영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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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실세의 그늘에 있는 김수임을 수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집에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들을 불심 검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엘리트 공산주의자이자 남로당의 3대 거물로, 1949년 전향해 대공 수사관이 된 홍민표는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과 협의했으나 베어드 대령 때문에 당장 체포하기는 어렵고 검찰과 협의하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오제도 검사, 장도영 육군 정보국장과 차례로 협의한 끝에 군이 체포하는 형식을 취하고, 수사는 홍민표 책임하에 시경 사찰과 별관에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육군 특무대 이한진 소령 등 수사팀은 1950년 3월 19일 김수임을 체포하고, 집에서 권총 3정과 실탄 200여 발, 그리고 북한으로 보내려던 기밀문건 다수를 압수했습니다.
수사팀은 김수임의 신분을 감안해 최대의 우대를 해주면서 심문을 벌였습니다. 김수임이 법정 최후 진술에서 두 달간 편하게 먹이고 재워줘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수사기관이 밝혀낸 김수임의 혐의는 19개였습니다. 가장 중대한 것은 1949년 미군 철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박민호, 김용봉을 통해 북한에 보냈다는 것과, 미국의 한국 경찰 무장 해제 요구에 대한 정보를 북한에 제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 이미 남침을 준비하고 있던 김일성 정권에서 미군 철수는 가장 목말라하던 정보였고, 군과 대등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던 경찰의 무장 해제 문제 역시 매우 민감한 정보였습니다. 남로당은 자신들의 프락치가 많이 침투해 있던 군보다 경찰을 우선 공격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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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베어드 대령을 통해 빼낸 정보였고, 정보는 고스란히 이강국에게 흘러들어갔습니다. 김수임은 1947년 12월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공작비(일본은행권)를 땔감으로 속여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 트럭으로 서울로 옮겨주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수십 차례에 걸쳐 남로당원들에게 자동차 사용 허가를 내주고, 자금을 제공하고, 신병을 숨겨줬습니다. 수감돼 있던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을 군 내 남로당 프락치를 통해 탈출시키고 집에 숨겨준 사실, 그리고 개성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허위 구실을 만들어 이중업을 의사로, 최만용을 조수로 가장시키고 김수임 자신도 미 대사관 차량에 타고 개성까지 동행해 월북시켰다는 내용도 수사 결과에 포함됐습니다.
김수임에 대한 재판은 군법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국방경비법상 간첩 이적 행위는 민간인이라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게 돼 있었습니다. 김수임이 빼돌린 중요 기밀은 군과 관련된 기밀이었고, 그래서 김수임을 체포한 것도 군 수사기관이었습니다. 고등군법회의 재판에는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고,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공개 진행됐습니다. 김백일 대령(6·25전쟁 영웅)이 재판장을 맡고, 강영훈 대령(훗날 국무총리 역임) 등 재판관만 6명, 그리고 군이 선임해 준 변호인 2명에 민간 변호인 2명까지 변호인단도 4명에 달했습니다. 이화여전 동창 모윤숙도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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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은 나쁜 부모를 만나 열두 살에 시집을 갔다가 그날 밤 족두리를 쓴 채 도망쳤습니다. 동대문 개천가에서 울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인도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입니다. 불우한 환경 때문에 적당한 결혼 상대도 없이 적령기를 지난 그가 이강국이라는 이성을 만나 신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김수임의 정치의식은 백치에 가까웠고, 이데올로기를 판단할 여유도 없었는데 스탈린의 주구인 악한 사나이가 그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라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모윤숙이 진술하는 동안 방청석은 물을 부은 듯 조용했고, 김수임은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고 1950년 6월 17일 자 경향신문은 보도했습니다. “김수임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여인으로서는 미모의 소유자가 못 되고 키도 작달막한 편이다”라는 내용도 경향신문 기사에 들어 있었습니다.
김수임은 19개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습니다. 민간 변호인 박원삼도 김수임이 이강국을 월북시켜 준 것, 거액의 남로당 공작금을 김수임이 운반해 준 것 등 사실관계를 모두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간첩 행위 의도는 아니고 이강국에 대한 애정과 물질적 욕망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김수임은 최후 진술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과 나를 키워준 부모, 사랑해 준 동무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좌익이 나쁘다 좋다를 생각 못했고 이강국이 하는 일은 좋다고 생각했다. 이강국을 사랑해서 요구를 들어준 것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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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6일 오전 9시 30분 속개된 고등군법회의에서 김수임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특히 국가 최대 기밀인 미군 철수와 경찰 무장해제 문제를 남로당에 제공한 것은 가장 악질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형은 6·25 남침 전쟁 직전 또는 직후 집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김수임의 나이 39세였습니다.
김수임 체포가 조금만 늦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김일성의 6·25 남침 이후 김수임은 애인 이강국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강국 역시 곧 비참한 최후를 맞기 때문입니다. 이강국은 월북 후 1947년 2월 김일성이 먼저 수립한 사실상의 정부였던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지냈습니다. 1950년 12월에는 인민군 야전병원장, 1951년 11월에는 조선상사회사 사장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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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53년 6·25전쟁 휴전 후 김일성이 남로당계에 대한 피의 숙청을 벌일 때 정부 전복 기도 및 테러 학살, 미국 첩자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자기 청춘을 바쳐 지킨 공산당 당적마저 제명됐고, 1953년 사형 선고를 받아 1955년 12월 10일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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