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분야 서울 명장’ 김인호 동양상사지기인쇄 대표가 본인이 소장한 고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지금도 고서를 보면서 ‘어떻게 이 책을 만들었을까’ 고민한다고 했다. 손인규 기자 |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 소년은 가난이 싫었다. 부모님은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전쟁통에 가세가 기우는 것은 순간이었다. 교복 입은 또래들이 학교에 갈 때면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골목 한쪽에 숨어 있기도 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업고교를 다녔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7세 소년은 교복을 입은 채 고향인 경북 상주를 떠나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때가 1970년이다.
당장 지낼 곳이 없어 기술이라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만드는 제책(製冊)회사에 들어갔다. 제책은 서사물을 실·철사·풀 등으로 묶고 겉장을 씌워 책으로 만드는 일을 말한다. 출판 과정의 가장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 17세 소년이 바로 김인호(73) 동양상사지기인쇄 대표다. 최근 서울 중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웃으며 자신이 책 만드는 일에 뛰어든 계기를 털어놨다. 어느새 소년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인이 됐다. 하지만 책에 대한 열정은 그 시절 그대로였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지낼 곳이 없어 회사에서 일하다 작업장 한편에서 토막잠을 자곤 했다”며 “이불이 없어 책을 만들고 나온 파지 덩어리를 덮고 잤는데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몇 년을 책 만드는 회사에서 지내다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당시 국정교과서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다.
김 대표는 “그때 들어간 내가 국정교과서 공채 1기”라며 “198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다 내 손으로 만든 교과서로 공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책 만드는 기술은 형편 없었다고 한다. 종이를 붙이는 풀은 품질이 좋지 않아 힘을 줘서 책을 펼치면 ‘탁’하며 종이가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종이의 품질도 좋지 않았다.
김 대표는 좀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어떤 종이를 써야 인쇄가 더 잘 되는지, 어떤 풀을 써야 오래도록 책이 떨어지지 않고 쓸 수 있는지 등을 밤을 새워서 연구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는 책 만드는 게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며 “일본이 책을 만드는 기술이 훨씬 앞서 있는데 일본 책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못 만드나 화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김 대표에게 일본 인쇄기계업체와 3개월 정도 같이 일할 기회가 생겼다. 그는 일본 업체 사장이 직접 현장을 다니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현장 작업자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모습을 보곤 ‘이거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 관리자들은 사무실 의자에만 앉아 서류만 보는데 ‘일본 사장’은 완전히 달랐다”며 “항상 현장에 있었고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내가 사업을 할 때도 그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잘 다니던 국정교과서 본사가 1991년 서울에서 충남 연기(현 세종)로 이전하게 되자 김 대표는 서울에 남아 창업을 결심했다. 1993년 동양상사지기인쇄를 세운 김 대표는 책만을 만들어서는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장용지 분야로 눈을 돌렸다.
‘인쇄 분야 서울 명장’ 김인호 동양상사지기인쇄 대표가 아들이 칠순 기념으로 선물한 응원 현수막 앞에서 웃고 있다. 손인규 기자 |
김 대표가 창업 후 집중해 온 ‘폴딩 카톤(Folding Carton·접음 상자)’은 의약품이나 화장품을 포장하는 사각형의 종이 박스를 말한다. 워낙 다양한 사이즈의 제품과 기술이 집약된 분야여서 도전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 의약품 패키징은 생명과 직결되기에 폴딩 카톤은 극도로 높은 품질 기준을 요구한다.
김 대표는 “약과 화장품을 담는 종이 박스는 제품의 얼굴이자 제품을 보호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아주 작은 오차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 기계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사람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지금도 현장에서 모든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별도의 영업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고객들이 알아서 찾아온다고 한다. 자체 개발한 ‘아이 마크(Eye Mark)’ 적용, 한글 홀로그램 도입 등 특허도 보유하고 있다.
30년간 한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김 대표의 회사는 연 매출 30억원의 실속 있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회사 임직원은 10명으로, 아내와 큰아들 내외도 함께 회사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김 대표는 “원래 미국에서 공부하던 아들에게 나와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해 15년 전부터 함께 일하고 있다”며 “아직 더 배울 게 많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 길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고 말했다.
지금은 사업을 위해 포장 용기에 집중하고 있지만 김 대표의 마음은 항상 17세의 소년처럼 책에 가 있다. 여기저기서 고서(古書)를 모아 보면서 ‘어떻게 이 책을 만들었을까’ 고민하고 분석한다고 했다. 그는 “길에 떨어진 돈은 안 주워도 책은 무조건 줍는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인쇄 분야 서울 명장’ 김인호 동양상사지기인쇄 대표가 책을 만드느라 지문이 닳아없어진 양손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손인규 기자 |
50년 동안 한길만을 걸은 김 대표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는 대뜸 양손을 펼쳐 보이며 “손으로 하도 종이를 많이 만졌더니 지문이 다 닳아 거의 없어졌다”면서 “외국에 나갈 때 여권 심사를 하는데 종종 지문 인식이 되지 않아 한참 걸릴 때도 있다”며 껄껄 웃었다.
이렇게 김 대표가 쌓아온 50년의 세월은 최근 큰 보상을 받았다. 서울시는 지난달 ‘2025 서울 명장’ 5인을 선정했는데 인쇄 분야 장인으로 김 대표를 선정했다.
김 대표는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을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쓰기로 했다. 500만원은 국내 대표 직업 교육 훈련기관인 한국폴리텍대에 기부했고, 나머지 500만원은 인쇄 분야를 가르치는 그래픽아트과가 있는 특성화고인 서울공고에 기부할 예정이다. 이미 김 대표는 지난 10년 넘게 중구가 운영하는 중구인재육성장학재단 이사를 지내며 매년 1000만원 넘는 돈을 기부하고 있다.
김 대표는 “어렸을 적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돼 후배들은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들한테 주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말하며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50년의 세월 동안 한 우물을 판 장인(匠人)이 요즘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김 대표는 “인공지능(AI)의 출현으로 은행 직원이나 디자이너가 필요치 않은 세상이 돼 가지만 제조업은 아직 사람 손이 안 가면 안 되는 현장이 많다”며 “넥타이 매고 대기업에 다니는 게 좋아 보이겠지만 기술을 배우면 정년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평생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향 친구 중에 서울대 나온 친구도 있고 큰 기업에 다니던 친구도 있지만 지금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밥 사고 술 산다”면서 “지금도 일을 할 수 있기에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