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출처: 미상, Public domain,1920, Original uploader was Calliopejen1 at en.wikipedia) |
1937년 신문 기사는 향수 중 ‘샤넬 넘버 5’가 “제일 고급”이라고 전했다.
“학구라이(舶來·외제) 향수로 요사이에 제일 고급이라고 하는 ‘샤넬’의 제오번이 일백삼심원에 팔리고 있으나…”(1937년 9월 28일 자 석간 4면)
당시 신문이 ‘샤넬 넘버 5’ 값이라고 전한 130원은 직장인 두 달 월급에 해당했다. 기자 월급이 60~80원일 때였다.
90년 전 식민지 조선에도 이름이 알려진 프랑스 디자이너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1883~1971)은 애칭 ‘코코 샤넬’로 더 유명하다. 10대 후반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시절 자주 부른 노래 ‘누가 트로카데로에서 코코를 보았나(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에서 ‘코코’라는 이름이 붙었다. 12세 때 부모를 여의고 보육원과 수도원에서 자란 후 가수를 지망하던 때였다.
코코 샤넬 별세. 1971년 1월 12일자 5면. |
1971년 1월 12일 자 조선일보 부음 기사는 디자이너로서 샤넬의 업적을 “여성 의상을 19세기적 고전주의에서 실용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샤넬은 여성이 입는 옷은 여성에게 편해야 한다고 여겼다. 남성이 보기에 좋은 의상이 아니라 여성이 볼 때 아름다운 디자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렁치렁 늘어진 치맛단을 자르고 허리를 조여 매는 ‘코르셋’을 버렸다. 남성용 스웨터와 통 넓은 바지를 여성용으로 개량했다. 검은색은 장례복이라는 편견을 버린 ‘리틀 블랙 드레스’를 선보였다.
2002년 11월 24일자. |
향수 ‘샤넬 넘버5’는 1921년 러시아 출신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출시했다. 보는 시제품 10개를 만들면서 1번부터 5번, 20번부터 24번 번호를 매겼다. 샤넬은 그중 ‘5번’을 골랐다.
조선일보 1981년 3월 시리즈 기사 ‘아름다움에의 여로-화장품에 신들린 사람들’의 첫 2회는 ‘코코 샤넬’이 주인공이다.
“그 중에서 샤넬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이 ‘5번’ 병에 든 향기였다. 그것은 향수 향기의 3대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꽃향기, 동물성 향기, 목조향기가 알맞게 조화된 것으로 어느 한 가지 향기가 강하게 작용하는 일이 없는, 새로운 향수였다. (중략) 고(故) 마릴린 몬로가 매일 밤 “잠잘 때 입는 것”이라고 했대서 한때 큰 화제가 되기도 한 향수다.”(1981년 3월 10일자 11면)
1981년 3월 7일자 11면. |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서의 명성은 2차 대전 중 위기를 맞았다. 독일 나치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다. 모두 샤넬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여겼다. 아니었다. 샤넬은 10여년 간 스위스 은둔 생활을 접고 71세 때인 1954년 프랑스 패션계에 복귀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비난하고 조롱했지만 여성을 해방시킨다는 패션 철학은 다시 주목받았다.
복귀 이듬해인 1955년 2월 출시한 때를 이름으로 삼은 ‘2.55 플랩 백’을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어깨끈을 단 핸드백이었다. 가방에 금속 줄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었다. 핸드백을 들던 여성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명품 제국’은 샤넬이 70대에 다시 시작해 일군 것이다.
2016년 3월 18일자 A27면. |
샤넬이 나치에 협력했다는 건 사실일까? 2016년 3월 공개된 1944년 비밀문서는 “샤넬이 1942~1943년 귄터 폰 딩크라게 남작의 정부(情婦) 겸 공작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밀 기록 관리 책임자는 “독일 입장에서는 정보 제공 임무 수행 등을 위해 샤넬을 공작원으로 등록했지만, 샤넬 입장에선 자신이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활동했을지는 의문”(2016년 3월 18일 A27면)이라고 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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