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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가운 대신, 수퍼맨 망토를 택한 남자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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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상혁 기자의 행각]
수퍼히어로 본산 DC코믹스 수장
전설적 한국계 미국 만화가 짐 리
만화 같은 일이었다. 네 살배기 꼬마가 트럭에 치였다가 멀쩡히 살아난 이야기. “서울 살 때였어요. 노량진이었다고 들었어요. 친구들과 골목길을 건너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아주 시작 단계에서 제 삶을 끝장낼 수도 있던 사고였죠.” 바퀴에 깔려 있었다.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다. “트럭 밑에서 액체 같은 게 얼굴로 떨어지던 느낌이 기억나요.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고, 온통 초록빛이었죠.”

–초능력 같은 게 생겼나요?

“뭔가 달라지기는 했죠.”

교통사고 이듬해인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초인적인 실력을 과시하며 그는 만화가 짐 리(Jim Lee·62)가 됐다. 한국 이름 이용철.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으로 유명한 미국 수퍼히어로 만화 92년 역사의 본산 DC코믹스 대표(President)를 맡고 있다. 명실상부 업계 레전드로 군림하는 남자. 손으로 거미줄을 쏘거나 눈에서 광선을 내뿜는 별종들을 그려내며 대박을 터뜨렸는데, 일례로 그가 1991년 그린 ‘엑스맨 #1’은 단일 만화책 최다 판매(810만부)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그가 서울에 왔다. 1월 1일, 하늘을 날아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수퍼맨·배트맨·원더우먼…. 웬만한 수퍼히어로는 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2024년 뉴욕 코믹콘 참석 당시 짐 리의 사진을 배경으로 짐 리의 대표작 표지를 합성했다. /게티이미지·DC코믹스

수퍼맨·배트맨·원더우먼…. 웬만한 수퍼히어로는 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2024년 뉴욕 코믹콘 참석 당시 짐 리의 사진을 배경으로 짐 리의 대표작 표지를 합성했다. /게티이미지·DC코믹스


역시 만화 같은 일이었다. 올해 데뷔 40년 차, 미국 최대 만화 회사를 거느린 거장의 첫 한국 팬 미팅은 대규모 박람회장도 멀티플렉스도 아닌, 동네 만화 가게에서 치러졌다. 독자들과 둘러앉아 콜라를 홀짝이며 함께 그림 그리고 추후 경매에 부쳐 수익금은 불우이웃에 기부하는 ‘드링크 앤 드로’(drink and draw) 행사. 이날 밤 8시, 서울 장안동 미국 코믹스 전문점 ‘DCC카페’는 팬들로 초만원이었다. 70평 실내가 인파로 꽉 찼다. 안전사고 우려로 입장을 제한할 정도였다. 입장과 동시에 “이용철! 이용철!” 광란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반응이 엄청나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특히 젊은 층에게서 열기가 뜨거워졌어요. 이분들이 태어나기 전, 그것도 수십 년 전에 나온 만화에 이토록 열광한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한국은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좋은 나라예요. 왕조·식민지·전쟁 등 역사적 층위도 다채롭고, 로맨스·서스펜스·판타지 등 여러 장르에 열려 있죠. 회사 내부에서 한국 캐릭터와 한국 이야기를 더 많이 창조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짐 리가 대표로 취임한 2023년, DC코믹스는 새 한국계 수퍼히어로 캐릭터 ‘시티보이’를 내놨다. 도시와 생물처럼 소통하는 초능력 소년.


한복 차림으로 모친과 나란히 앉은 유년의 짐 리(맨 왼쪽). /인스타그램

한복 차림으로 모친과 나란히 앉은 유년의 짐 리(맨 왼쪽). /인스타그램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나요?

“미국 건너가기 전에도 수퍼맨을 봤어요. TV에서 ‘황금박쥐’를 본 기억도 나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그는 ‘황금박쥐’를 정확한 한국 발음으로 소리 냈다. 1967년 전파를 탄 최초의 한·일 합작 만화영화. 머리는 해골이요, 황금빛 몸으로 레슬링 장화를 신고 신출귀몰 악당을 궤멸한다. “망토도 두르고 있죠. 여러모로 수퍼히어로의 선구자예요.” 영어를 전혀 못 하던 어린 짐 리가 미국에서 처음 알아본 존재도 그들이었다. 정의의 용사, 약자의 친구.

–미국은 왜 가셨나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였죠. 네, 아메리칸 드림이요. 부모님은 북한에서 오셨고 전쟁을 겪었어요. 안정된 삶을 원했어요. 제 교통사고 이후에 특히 더 그러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의사였죠. 저 역시 의사가 되길 원하셨고요. 의사는 안정된 삶의 동의어였어요.” 그는 기대에 부응하며 착실히 공부했고, 미국 최고 명문 중 하나인 프린스턴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다른 꿈이 자라고 있었다.


◇수퍼히어로의 고독

지난 1일 밤 서울 장안동의 미국 코믹스 전문점 ‘DCC카페’에서 배트맨 드로잉을 완성한 뒤 팬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는 짐 리. 이번 방한은 DCC카페를 운영하는 조이 크로너·안양주 부부의 수 년에 걸친 섭외 요청으로 이뤄졌다. /정상혁 기자

지난 1일 밤 서울 장안동의 미국 코믹스 전문점 ‘DCC카페’에서 배트맨 드로잉을 완성한 뒤 팬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는 짐 리. 이번 방한은 DCC카페를 운영하는 조이 크로너·안양주 부부의 수 년에 걸친 섭외 요청으로 이뤄졌다. /정상혁 기자


짐 리가 종이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슥슥, 스케치를 시작하자 남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배트맨이었다. 단단하고 섬세한 필체, 그의 배트맨 작화(作畫)는 단연 독보적인 예술의 경지로 평가받는다. 한 남성 팬이 외쳤다. “새해 첫날 짐 리가 배트맨 그리는 걸 눈앞에서 보다니. 이게 해돋이지.” 구석에 앉아 있던 열다섯 살짜리 한국인 소녀가 쭈뼛쭈뼛 다가와 짐 리에게 자신의 그림을 내밀었다. 만화가가 꿈이라고 했다. “정말 대단해. 걷는 법을 제대로 배웠구나. 그래야 뛸 수 있지. 부모님이 응원해주시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응원하셨나요?

“제가 만화책 보는 걸 안 좋아하셨어요. 내다 버리곤 하셨죠. 그럼 저는 다시 주워오고요.”

–어떤 아이였나요?

“유년을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냈어요. 중서부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숲에서 나무를 베다가 실수로 도끼로 친구의 발가락을 자르기도 하고, 개울에서 개구리를 잡아 산 채로 해부하려고도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며 컸죠. 핸드폰 같은 건 없었으니까.”


모든 꼬마가 그렇듯, 판타지를 사랑했다.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악당을 깨부수는 만화. “멋지잖아요. 오로지 그 이유였어요.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됐죠. 수퍼맨도 나처럼 다른 행성에서 온 완전한 이방인이었고, 그래서 그의 외로움에 공감했다는 걸요. 당시엔 한국에서 왔다는 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어요. 수퍼맨은 평범한 사람처럼 변장할 때 안경을 쓰곤 하는데, 그건 저도 쓰던 방법이었죠.” 그랬던 그는 2024년 미국 카네기재단이 발표한 ‘위대한 이민자 10인’에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모교 프린스턴대학교 이사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그래서 꿈이….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의사가 되기는 싫었어요. 아, 사람들을 돕고 싶지 않다(웃음). 사실 대학 졸업 전에 모든 준비는 다 했어요. 의대 예비 과정인 유기화학 같은 과목도 전부 수강했어요. 의학대학원 입학시험인 MCAT도 치렀고, 추천서도 받아놨고, 필요한 건 다 했어요. 부모님이 원하셨고 저도 꽤 잘했어요. 그 길로 갔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내 자신이 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짐 리가 그린 배트맨 스케치. "수백 번이나 그렸지만 매번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며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만 항상 예상했던 방식은 아니라는 게 바로 스케치의 묘미"라고 했다. /인스타그램

짐 리가 그린 배트맨 스케치. "수백 번이나 그렸지만 매번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며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만 항상 예상했던 방식은 아니라는 게 바로 스케치의 묘미"라고 했다. /인스타그램


–후회는 없었나요?

“의대에 억지로 진학한 한국인들이 항상 걱정돼요. 그런 의사에게 수술받기 싫잖아요. 제 만화책은 언제든 펼쳐도 좋지만, 제 몸은 만지지 말아 주세요.”

–부모님 반응은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먼 나라로 떠나왔는데, 장남이라는 녀석이 바지 위에 팬티를 걸쳐 입는 수퍼히어로나 그리겠다고 하니…. 부모가 돼 보니 그 심정을 알겠어요. 울고불고 싸우다 ‘딱 1년만 시간을 달라’고 했죠. 증명해야 했어요. 내 힘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침대 옆에 제도용 책상을 놓고, 알람시계를 맞춰놨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몸을 굴려 의자에 앉아서는 12시간씩 웅크려 그렸다. 손가락 신경이 짓눌리는, 체질을 바꾸는 혹독한 훈련. “보다 못한 아버지가 어깨를 뒤로 젖혀주는 보호대를 사주셨다”고 했다. 투고와 거절이 반복됐다. “우편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뉴욕 만화 행사장에 직접 찾아가 출판사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여줬죠.” 마블코믹스에서 연락이 왔다. 1987년이었다.

–증명했군요.

“첫해 2만1000달러(약 3000만원) 정도 벌었을 거예요. 해결책은 그거예요. 집을 사드리세요. 그게 제가 어머니께 한 일이었죠. 대학 등록금을 모두 갚았고요. 그제야 이게 진짜 직업이라는 걸 이해하셨어요. 결국 결과로 말해야 해요.”

◇거장이 되는 가장 단순한 방법

짐 리가 1991년 그려 역대 만화책 최다 판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엑스맨 #1’. /마블코믹스

짐 리가 1991년 그려 역대 만화책 최다 판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엑스맨 #1’. /마블코믹스


짐 리는 별다른 도구를 쓰지 않았다. 연필 선 위에 붓질을 더하고, 구긴 휴지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에 비벼 밤의 배경을 만들었다. 하이라이트 효과를 위해 수정액(화이트)을 집어든 그가 “혹시 플라스틱 같은 거 있나요?”라고 물었다. 기자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건네자, 카드 모서리에 수정액을 조금씩 묻혀가며 흰 빗금을 그었다. 순식간에 그림에 극적인 아우라가 생겨났다. 기자 옆에 있던 다른 만화가가 “그 카드, 가보로 간직하라”고 귀띔했다.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게 뭔가요?

“그림의 90%는 뇌입니다. 가장 큰 도구는 손이 아니라 머리죠. 배경에 넣을 가게 간판을 그릴 때조차 생각을 해야 해요. 가상의 브랜드를 만들고, 그 브랜드의 전체 역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거나 그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친구나 가족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가게를 차린다면 어떤 가게일까? 로고는? 글씨체는?”

–심리학 전공이 도움이 됐나요?

“정말로요. 캐릭터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하니까요. 여러 성격에 대한 통찰을 주죠. 배트맨이든 조커든,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소통의 방식에 대해서도요.”

대학 때 배운 마임(mime·표정과 몸짓만으로 이뤄진 연극)도 응용했다. 과거 ‘마블코믹스의 아버지’로 불린 만화가 스탠 리(Stan Lee)와의 대담에서 짐 리는 “판토마임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게나 저항이 느껴지는 착각을 만드는 기술”이라며 “만화도 비슷하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거니까요. 누군가 위협적이라면 정말 거대하게 그리고, 자동차가 코너를 돌 때면 바퀴가 공중에 뜨고 연기가 나고 종이가 흩날리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 거죠. 그런 디테일이 중요해요.”

–배움은 언제든 쓸모가 있군요.

“만화만 보지 말고 소설도 읽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하기 전에 요령부터 알고 싶어 합니다. 더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하는 거예요. 하다 보면 배우게 됩니다.”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수퍼맨' 촬영장에서 제작진과 함께 선 짐 리(맨 앞 왼 쪽). /인스타그램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수퍼맨' 촬영장에서 제작진과 함께 선 짐 리(맨 앞 왼 쪽). /인스타그램


작화가를 넘어 캐릭터와 세계관을 창조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1992년 와일드스톰 프로덕션과 이미지코믹스를 공동 설립했다. 오랜 친구인 한국계 미국 만화가 브랜던 최(Brandon Choi) 등과 함께 아시아계 수퍼히어로 ‘그레일’ ‘그런지’ 등을 세상에 내놨다. 와일드스톰은 1998년 DC코믹스에 인수됐고, 이미지코믹스는 미국에서 셋째로 큰 만화 회사로 성장했다. 2010년 DC코믹스로 이적한 짐 리는 만화·영화·게임 등 각종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수퍼히어로 월드를 확장하고 있다.

–창작과 경영, 병행이 되나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지금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화를 한쪽이라도 더 그려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만화가는 궁극적으로 이야기꾼이잖아요. 궁금하게 하고 계속 읽게 만드는 사람. 비즈니스는 창작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비즈니스를 모르면 이야기를 오래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계약서를 읽고 숫자를 봅니다. 예술을 더 오래 하기 위해서요.”

–뭐가 가장 힘든가요?

“커리어 단계마다 다른 것 같아요. 요즘은 가족과 일의 균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워요. 얼굴 하나를 그리든, 캐릭터 열 명을 그리든, 최소 8~10시간은 걸리거든요. 늘 깨어 있어야 하거든요. 크리스마스든 추수감사절이든, 심지어 지금 1월 1일 밤에도 배트맨을 그리고 있잖아요.”

–성공의 비결일까요?

“매일 10시간씩 혼자 뭔가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자신을 믿어도 됩니다.”

◇한국계 수퍼히어로, 세계로

DC코믹스에서 출간한 새 한국계 수퍼히어로 만화책 '시티보이'. 한국 만화가 정민규, 한국계 미국인 부친을 둔 스토리 작가 그레그 팩이 집필했다. /DC코믹스

DC코믹스에서 출간한 새 한국계 수퍼히어로 만화책 '시티보이'. 한국 만화가 정민규, 한국계 미국인 부친을 둔 스토리 작가 그레그 팩이 집필했다. /DC코믹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뭔가요?

“아무래도 배트맨이나 울버린에 애착이 가죠. 워낙 오랫동안 그렸으니까요.” 짐 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국 만화가 밥 레이턴(Bob Layton)이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 45년간 아이언맨을 그린 사람도 있다오.”

–악당도 좋아하세요?

“모든 캐릭터를 사랑해요. 시시한 캐릭터조차도요. ‘좋아, 이걸 어떻게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하죠. 제가 정말 싫어하는 건 누군가가 ‘이거 대충 그렸군’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건 ‘서둘렀군’의 다른 말이죠.”

세상은 빨라지고 있다. 더 가속화될 것이다. 그 중심에 인공지능(AI)이 있다. 지난해 10월 짐 리는 뉴욕 코믹콘에서 “내가 있는 한 DC코믹스는 결코 생성형 AI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만화 역시 변화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면서도 “우리 일은 인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그릴 때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번짐, 거침, 망설임, 그것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팬들은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뭔가 정성스레 만들어졌다는 것,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갔다는 것을요.”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네요.

“예술가는 항상 약자였습니다.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요.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서두르지 않아요. 월급을 받기 위해 페이지를 억지로 찍어내지 않습니다. 만화의 즐거움은 완성의 과정에 있습니다. 이건 비즈니스 관점에서도 산업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만약 AI로 만화책을 생산한다면, 팬들은 대체 뭘 구매하는 걸까요?”

최근 한국저작권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미국 코믹스 매장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7% 증가했다. “Z세대 독자의 대거 유입으로 수집가 중심이던 만화책 시장이 실제 독서를 위한 구매 중심으로 전환”됐고 “이들이 만화 가게가 제공하는 대면 커뮤니티 경험을 갈망하고 있다”는 분석. 진입 장벽을 더 허물기 위해 만화 회사 측도 수십 년간 얽히고설킨 복잡한 설정을 싹 걷어내는 한편, 국적별 수퍼히어로를 잇따라 생산해 팬층을 넓히고 있다. DC코믹스는 탈북자 수퍼히어로(안광조·드래곤손)까지 내놨다.

북한에서 TV로 몰래 해외 방송을 봤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초대형 게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으로 탈북에 성공하는 수퍼히어로 안광조. /DC코믹스

북한에서 TV로 몰래 해외 방송을 봤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초대형 게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으로 탈북에 성공하는 수퍼히어로 안광조. /DC코믹스


–더 나올까요?

“한국은 독특한 이야기를 위한 좋은 토양을 갖췄어요. 남북 분단 현실도 그중 하나고요. 한국 작가들의 활동은 이미 시작됐죠. 다만 캐릭터에 한국적 외모를 부여하고 한국식 능력을 투입하는 게 전부가 될 수는 없어요. 더 깊이 들어가야 해요. 한국 역사와 스토리텔링에는 아직 활용하지 못한 자원이 많으니까요.”

밤 10시, 짐 리의 손에서 배트맨 드로잉이 완성됐다. 서명을 한 뒤 트로피처럼 들어 보이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 남성 팬이 그에게 피로 회복을 위한 영양제를 선물했다. 완성된 그림은 곧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었지만, 짐 리가 “미흡한 부분을 조금 손봐서 내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아무리 작아도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만화란 무엇입니까.

“이 업계는 쉽지 않습니다. 성공했다고 느껴도, 언제든 끝날 수 있죠. 그래서 커뮤니티가 중요합니다. 함께하는 사람들. 오늘 이 장소처럼요. 이런 만남이 계속 이 일을 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제가 그린 캐릭터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다는 걸 직접 볼 수 있으니까요.”

–계속 그릴 건가요?

“그릴 수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손이 떨려도 눈이 안 보여도 방법은 있습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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