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경제부 기자 |
학기가 끝날 때쯤에야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았다. 아무도 필기를 하지 않았다. 필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수업을 녹음하고 있었다.
AI가 강의를 정리해주는 시대
학기 초, 기말고사는 단답형과 짧은 서술형 문제가 섞인 지필고사가 될 거라고 예고했었다. 누군가에겐 C학점을 반드시 줘야 하는 상대평가 강의였다. 학점을 둘러싼 공정성 시비를 피하려면 정해진 답이 있는 시험이 나았다. 솔직히 채점하기도 더 편하다.
학생 입장에서 이런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잘 정리된 강의 녹취록이다. 그리고 인공지능(AI) 기술로 클릭 한 번이면 음성 녹음을 텍스트로 변환할 수 있다. 모두가 수업을 녹음하는 이유다. 아마도 학생들에게 그 대면수업은 빨리감기가 되지 않아 답답한 인터넷 강의와 다를 바 없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AI 기술은 더 발전했다. 요즘엔 녹음파일을 올리면 AI가 기말고사 대비 자료와 예상 문제까지 척척 뽑아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인기를 끈다. 출석 체크만 아니라면 굳이 강의실에 가지 않고 녹음본만 구해도 웬만한 수업은 학점 따는 데 문제가 없게 됐다.
만약 그런 수업이라면 굳이 대면으로 진행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AI 녹취록의 발전은 대면수업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이제 얼굴을 마주 보는 대면수업이라면 온라인 강의와는 달라야 하는 게 맞다. 수업 진행은 물론 평가 방식까지 말이다.
수업 녹음본을 얻는 학원 강사들
대학생의 강의 녹음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AI 도움을 받긴 하지만 스스로 공부하려는 목적이니 말이다. 그런데 특목고 학부모들로부터 전해 들은 고등학교 이야기는 훨씬 심각했다. 수업 녹음파일이 통째로 사교육 시장의 내신 대비 강사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고등학교에선 시험 점수 1점 차이로 내신 등급이 바뀌고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친다. 성적에 목맬 수밖에 없는 입시생들은 ‘OO고 내신 전문’을 내건 사교육에 의지한다.
시험 문제를 내는 건 학교 교사인데, 학원 강사가 이를 가르치려니 비법이 필요하다. 예전엔 그 열쇠가 학생들이 제공한 노트 필기였다. 이젠 그게 학생들이 넘겨준 수업 녹음파일로 바뀌었다. AI 기술을 이용하면 수업 내용을 통째로 텍스트로 정리하는 건 물론, 교사의 어조나 반복되는 키워드까지 데이터화해 분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잘나가는 학원 강사들은 이런 AI 기술을 치밀하게 이용한다. 예를 들어 학교 교사가 여러 교실에서 한 수업 내용을 집약한 뒤, 이 반과 저 반에서 설명이 달랐거나 애매한 부분을 찾아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그 내용을 질문하도록 시킨다. 그렇게 학생 질문이 쏟아지면 해당 교사가 부담을 느끼고 그 문제를 출제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고교 수업 내용이 고스란히 학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황당한데, 학교 시험 문제 출제에까지 학원 강사의 영향력이 미치다니.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높은 내신 등급을 받으려 애쓰는 교육 현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입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고교 수업의 가장 큰 목적은 내신 등급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AI 기술로 무장한 내신 사교육의 침범을 피할 도리가 있을까. 기술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 중심의 내신 상대평가가 공교육의 위기를 부추긴다. AI가 수업을 요약하고 학원이 시험 문제를 예측하는 시대, 공교육 대면수업의 의미를 찾으려면 새로운 평가 제도를 고민할 때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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