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열 정치부 차장 |
보수 원로 중에는 15대 총선을 치른 1996년 전후를 역대급 전성기로 지목하는 이들도 많다. 운동장을 넓게 쓰며 인적 쇄신에 성공하고 외연을 대폭 넓혔기 때문이다. 1994년 첫 지방선거 참패 이후 정권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좌우를 넘나들며 폭넓게 인재를 영입했고 당명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도 그때 당에 들어왔다.
야권과 진보 진영은 큰 충격을 받으며 배신감에 휩싸였다. 이재오와 김문수가 민주화운동사(史)에서 갖는 무게감과 파급력 때문이었다. 이재오는 재야·민중운동의 거목이었다. 다섯 번이나 감옥을 다녀오며 독재와 싸웠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수많은 운동가들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향할 때도 민중당을 만들어 진보 진영을 지켰다.
동시대의 김문수는 노동운동의 대부였다. 노회찬 심상정은 김문수 앞에서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얘기가 지금도 노동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사회 변혁’을 내걸고 1980년대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이끌었다. 보안사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심상정의 이름을 불지 않은 것도 유명한 얘기다. 김문수도 두 민주당으로 가지 않고 이재오와 함께 민중당을 지켰다.
그랬던 이재오와 김문수가 보수 정당에 입당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과 쇄신을 위한 당의 몸부림, 두 인사를 받아들인 유연성과 덧셈정치 등이 뒷받침한 결과였다. 김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127일 만에 물러난 ‘대쪽 판사’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도 1996년 입당했다. 인적 쇄신에 성공한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야권이 구축한 정권심판 프레임을 이겨내며 139석을 얻어 원내 1당 유지에 성공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이혜훈 전 의원을 지명한 날 국민의힘은 이 후보자를 즉각 제명했다. 지도부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탐났느냐”며 이 후보자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낙마를 위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장동혁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해당 행위 인사들을 제대로 조치하지 못해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며 당성(黨性·당에 대한 충성도)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어 친윤(친윤석열) 인사들을 지도부에 다시 기용하고 한동훈 전 대표를 징계하기 위한 윤리위도 가동시켰다. 한때 김문수와 이재오를 영입하며 덧셈을 거듭하던 정당이 어쩌다 이렇게 뺄셈만 하고 있을까. 장 대표에게 배신자 응징과 한 전 대표 징계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다.
유성열 정치부 차장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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