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동아일보 언론사 이미지

무야, 무우야[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24〉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원문보기

무야, 무우야

이 짧고 맑은 가을볕 아래
네 희고 둥근 엉덩이로 흙을 조금씩 밀어내고
그 속에 집 짓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사뭇 진지해야 되는데

무야, 무우야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는데
무얼 잡고 힘을 쓰는지
네 희고 둥근 엉덩이로 조금씩 흙을 밀어내고
그 안에 들어가 사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왜 이렇게 즐거우냐

―이상국(1946∼ )



연말에 식구가 병이 나 며칠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퇴원 후 입맛이 돌아오지 않고 핼쑥해져 걱정이었는데 곁에서 본 선배가 “우리 엄마 무를 먹여보자!” 했다. 무? 처음엔 흘려들었는데, 선배의 어머니가 ‘칼무’로 담근 김치를 맛보고 식구의 입맛이 돌아오더니 그때부터 차곡차곡 빠진 살을 되찾는 게 아닌가! 과연 지금껏 맛본 모든 무김치 중 최고의 맛이었다. 선배의 어머니는 연이어 섞박지, 순무김치, 깍두기를 담가 보내주셨고 무는 더 이상 평범한 채소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보약이었다.

새해가 되도록 온통 무 생각에 사로잡힌 와중에 이 시를 읽고 반가웠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무야, 무야” 부르고 싶고, 치켜세우고 싶어지는 날이 있는 걸까? 마지막 연을 보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마땅히 잡을 것도 없는 무가 땅속에서 끙끙 힘을 주며 자라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지금도 무는 “희고 둥근 엉덩이로 조금씩 흙을 밀어내고” 단단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체하면, 할머니가 껍질을 깎아 얇게 저민 무를 손에 쥐여주었다. 좁은 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휘청휘청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어른들은 얼른 동치미 국물부터 마시게 했다. 찬양하기에 마땅한 무, 누군가를 위해 무김치를 해 먹이는 사람에게 큰 복 있기를! 괜히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다. “무야, 무우야!”

박연준 시인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눈옷 입은 인제 자작나무숲
    눈옷 입은 인제 자작나무숲
  2. 2안세영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안세영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3. 3FC안양 임완섭 권우경
    FC안양 임완섭 권우경
  4. 4박나래 갑질 의혹
    박나래 갑질 의혹
  5. 5이준석 연석회담 수용
    이준석 연석회담 수용

동아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