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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의 진상, 2250년 만에 국내 학자가 밝혔다?

조선일보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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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서울대 교수의 ‘사기’ 자객열전 재해석
장이머우 감독의 2002년 영화 '영웅'에서 자객 역을 맡은 리롄제(이연걸). '사기' 자객열전의 형가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다.

장이머우 감독의 2002년 영화 '영웅'에서 자객 역을 맡은 리롄제(이연걸). '사기' 자객열전의 형가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다.


‘2250년 전 동양사를 뒤흔들었던 사건의 진상’이 새로 밝혀졌다고 해야 할 것인가. 기원전 227년 중국 진(秦)나라에서 일어났던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 얘기다. 사건이 기록된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86)의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최근 국내 학자가 했다.

중국 고대사 전공인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계간 인문 학술지 ‘문헌과 해석’의 100호에 논문 ‘형가가 진왕을 칼로 찌르다?’를 썼다. 이 학술지는 지난해 여름호인데 여름호가 12월에 나왔다. 국내 잡지계의 사정이 이처럼 어렵다.

이 논문에 대해 나는 지난 5일 자 조선일보 A20면에 <“진시황 암살 미수? 죽이려 한 게 아니라 칼 들고 협박했던 것”>이란 기사를 썼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내용을 ‘돌발史전’을 통해 풀어 보겠다.

자객열전에서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의 왕궁인 함양궁에 칼을 숨기고 들어간 사람은 형가(荊軻)다. 중국 역사에서 관우와 악비처럼 대중적 영웅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숱한 문학 작품과 영화·드라마가 그를 소재로 나왔다. 심지어 중국의 양대 감독이던 천카이거와 장이머우가 3년 간격으로 그를 극화했다. 천 감독의 1999년 작 ‘형가가 진왕을 찌르다(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와 장 감독의 2002년 작 ‘영웅’이다. ‘영웅’에서 형가에 해당하는 인물 역을 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리롄제(이연걸)였다.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영웅’에서 자객(리롄제)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영웅’에서 자객(리롄제)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


자, 여기서 천카이거 영화 제목을 보면 ‘형가가 진왕을 찌른’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당연히 형가가 칼로 진왕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찔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그래서 자객열전 원문에도 당연히 그렇게 적혀 있을 줄 알았다. ‘찌를 자(刺)’ 자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객열전에 ‘형가가 진왕을 찔렀다’로 알려진 구절에는 ‘자’ 자가 아닌 ‘침(揕)’ 자가 적혀 있었다. 김병준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왜 지난 2000년 동안 아무도 그 한 글자를 주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중영사전을 보면 ‘자’는 ‘pierce’, ‘침’은 ‘thrust’로 풀이돼 있다. 예기로 찔러서 피부를 관통한 것이 ‘자’라면 그 예기를 들이댄 것이 ‘침’인 것이다. 그럼 자객열전에 소개된 다른 자객들이 칼을 휘두른 장면에선 어떤 글자가 나오나? 오(吳)나라 공자 광의 사주로 오왕 요를 찌른 전저(專諸), 진(晉)나라 지백의 수하였다가 복수를 위해 조양자를 찌르려 했던 예양(豫讓), 한(韓)나라 엄중자의 사주로 재상 협루를 찌른 섭정(聶政)의 경우에는 모두 ‘자’ 자를 썼다. 찔렀거나 찌르려 했다는 얘기가 된다. 유독 형가의 경우에만 ‘자’를 쓰지 않고 허투루 ‘침’을 썼을 리가 없다. 뭔가 다른 자객의 경우와는 의도와 상황이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천카이거 감독의 1999년 영화 '형가가 진왕을 찌르다' 중 제목이 나오는 부분. 찌를 자(刺)자를 썼지만 실제로 '사기' 자객열전에는 형가가 진왕을 '자'했다는 기록이 없다.

천카이거 감독의 1999년 영화 '형가가 진왕을 찌르다' 중 제목이 나오는 부분. 찌를 자(刺)자를 썼지만 실제로 '사기' 자객열전에는 형가가 진왕을 '자'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자객열전에는 맨 처음에 ‘실제로 칼을 찌르지는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조말(曹沫)이다. 춘추오패 중의 한 명으로 이름 높은 제(齊)나라 환공을 비수로 겁박했다. 자객열전에는 이 장면에서 겁박할 ‘겁(劫)’ 자를 썼다. 그런데 동일한 장면을 묘사한 ‘관자(管子)’의 대광편(大匡篇)은 ‘환공(桓公)’이라고 썼다. 자, 이제 명백해진다. ‘침’이란 글자는 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칼을 들이대고 겁박하는 개념이라는 것 말이다.


지금까지 모두 ‘침’의 의미를 오독해 사건의 진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말이다. 형가는 거사에 실패한 뒤 진왕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일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은 당신을 살려 놓은 채 겁박해 반드시 약속을 받아 태자에게 보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겁박해서, 바꿔 말해 겁만 주고 협박해서 약속을 받는 것, 구체적으로는 연나라가 빼앗긴 땅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 형가의 진짜 목적이었다. ‘침=겁박하다’의 해석과 딱 맞아떨어진다.

기원전 227년의 상황은 이랬다. 이미 진나라는 삼진(三晉)으로 통칭되는, 그러니까 진나라가 세 나라로 나뉘어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그 세 나라인 한·위·조를 멸망시켰다. 북쪽인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던 연나라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실 베이징(北京)을 ‘연경(燕京·옌칭)’이란 별칭으로 부르는 것도 ‘옛 연나라의 수도’란 의미고, ‘삼국지’에서 장비가 ‘나는 연인(燕人) 장비다’라고 호통을 치는 것도 이 지역 출신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진왕 정에게 자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 자객이 형가였다. 지금도 킬러 영화에서 주인공을 묘사할 때 ‘과묵하고 불필요한 싸움을 피했고 지식이 많았으나 자랑하지 않았고 담력이 큰 인물’을 곧잘 등장시키는데, 형가가 꼭 그랬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주관이 강해 시장통에서도 남 눈치 보지 않고 행동했다. 자객열전에서 이를 표현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말이 사자성어로 굳어졌다. 다만 지금은 오만하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뜻이 바뀌었다.


형가는 태자 단에게 세 가지 요구를 했다. 첫째, 당대의 비밀 무기 전문가였던 것으로 보이는 ‘서 부인’이 만든 비수(匕首)인 상절(霜切)이 있어야 한다. ‘서리도 벤다’는 뜻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인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데, 여기에 작은 상처만 나도 죽을 수 있는 맹독을 구해 발랐다. 이게 다 무슨 무협지 같은 얘기냐고 생각할 분도 있겠지만 ‘사기’ 자객열전이 바로 모든 무협지의 원조이자 최초의 무협지다. 이게 오리지널이란 얘기다. 다만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역사서다.

둘째, 연나라의 곡창 지대인 독항 지방의 지도. 셋째, 진나라에서 망명한 장수인 번오기의 목. 번오기의 목으로 진왕의 환심을 산 뒤 둘둘 만 지도 속에 상절을 숨겨서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겠다는 것이었다. 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형가는 번오기를 설득했다. 번오기는 흔쾌히 그 제안에 응했다. 무슨 얘긴가?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 참으로 전율이 일어나는 스토리다.

여기서 변수가 일어난다. 형가의 거사에 동행할 ‘조수’로 태자 단이 진무양이라는 청년을 붙여 보낸 것이다. 진무양은 바로 연나라 장수로 우리에게는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침범한 것으로 잘 알려진 진개의 손자였다. “이 친구는 열세 살 때 살인을 했을 정도로 담력이 큰 사람일세.” 어떤 양아치였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묘사한 서기 3세기 한나라 때의 석판 탁본.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묘사한 서기 3세기 한나라 때의 석판 탁본.


태자 단이 형가에게 내린 지시를 면밀히 살펴보면 “진왕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진왕을 죽이지 말고 칼을 들이대 설득하되 어쩔 수 없으면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태자 단의 ‘큰 그림’이었다.

형가가 세운 구체적인 실행 작전은 이랬다. (1)형가가 진왕에게 번오기의 목을 바친다. (2)진무양이 지도를 바친다. (3)이미 번오기의 목을 바친 형가는 자연스럽게 진무양의 왼쪽으로 비켜 설 수 있게 된다. (4)진무양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도를 다 펼치면 비수가 드러날 텐데, 형가는 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왼손으로 진왕의 오른손을 잡아 제압한 뒤 오른손으로 비수를 들이대 겁박하고 연나라 땅을 돌려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5)만약 이것이 실패할 경우 들고 있던 비수로 진왕을 찔러 죽인다.

계획은 완벽한 듯 보였다. 조수가 믿을 만한 자가 못 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플랜(1)은 잘 넘어갔다. 그런데 형가가 계단을 올라 진왕에게 번오기의 목을 바친 뒤, 지도를 바쳐야 할 진무양이 부들부들 떨며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왜 저러지?” 사람들이 의아한 목소리로 웅성대자 형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북방 오랑캐 촌놈이라 저렇게 떠는 겁니다. 하하, 제가 대신 지도를 바치겠습니다.” 당시 중원 사람들의 눈엔 연나라 사람도 오랑캐로 보였나 보다.

그런데 진무양 대신 형가가 지도를 바치게 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계획대로라면 자연스럽게 진무양의 옆에 선 뒤 진무양이 지도를 다 펼친 순간 드러나는 비수를 재빨리 낚아채 진왕을 겁박해야 하는데, 본인이 지도를 바치게 되니 위치가 어긋나게 됐다. 지도를 다 펼친 형가는 순식간에 비수를 꺼내 들고 정면에서 진왕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진왕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소매가 찢어지게 됐다. 1차 시도 실패.

여기서 형가가 정말 진왕을 죽일 계획이었다면 굳이 급소를 노릴 필요도 없이 칼날로 진왕의 몸을 스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맹독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형가가 진왕을 계속 쫓아갔는데도 무기를 꺼내지 못한 진왕을 찌르지 못했다. 이제야 그 의문이 풀린다. 비수를 ‘들이대려’ 했을 뿐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왕 정 앞에서 비수를 뽑은 형가를 그린 현대의 상상화. /https://kan.china.com/read/1586748_2.html

진왕 정 앞에서 비수를 뽑은 형가를 그린 현대의 상상화. /https://kan.china.com/read/1586748_2.html


이 장면의 자객열전 묘사는 21세기의 기자가 보기에도 현장감 넘치는 르포를 읽는 것 같다. 형가는 기둥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하듯 진왕을 쫓아갔다. 당시 진나라 법에는 대전에서 무기를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무기를 가진 사람은 진왕뿐이었고 너무나 급박해 대전 밖의 군사를 부를 겨를이 없었다. 진왕은 허리에 의전용 보검을 차고 있었으나 너무 길어 칼집에서 뽑지 못했다. 신하들이 맨손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고, 어의인 하무저가 형가에게 약 주머니를 던졌다. 가루가 흩날려 잠시 시야를 가렸을 것이다.

이때 신하들이 진왕에게 소리쳤다. “왕부검(王負劍)! 왕부검!”

‘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고 뽑으라’는 얘기였다. 진왕이 얼른 신하들의 말을 따르니 칼이 뽑혔다. 그 칼로 형가를 내리쳐 다리를 잘랐다. 장검을 든 사람에게 비수를 지닌 자객은 사실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비수를 던지는 경우만 빼고. 이제 (5)번을 실행해야 했다. 쓰러진 형가는 있는 힘을 다해 진왕에게 비수를 던졌다. 아, 그러나 진왕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비수는 기둥에 맞고 말았다. 진왕이 칼로 형가를 여덟 번 내리쳤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그제야 비명을 듣고 대전으로 달려온 근위병들이 형가를 죽였다. 형가가 죽기 전에 내뱉은 말이 앞에서 언급한 그 말이었다. “일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은 당신을 살려 놓은 채 겁박해 반드시 약속을 받아 태자에게 보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어떻게 이렇게 마치 현장에서 목격한 듯 생생하게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어의 하무저가 바로 사마천의 스승 동중서의 친구였다고 하지만, 동중서가 대략 기원전 179년생이니 기원전 227년에 어의를 하고 있던 하무저의 친구는 될 수 없다. 어쨌든 아직 사마천의 시대에는 이 스토리가 이렇듯 디테일하게 얘기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후세 사람들은 형가를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무공을 의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독 묻은 비수를 들고서도 찌르지 못할 수 있지? 그러나 김병준 교수의 새 해석에 의하면 결코 형가의 무공이 뒤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게 된다. 사마천도 줄곧 형가의 ‘자질 자객’이 충분하다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고우영이 1987년에 단행본으로 내놓은 만화 '역수의 시'. 형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만 고우영 본인의 그림이라기엔 작화 수준이 현저히 낮고, 이야기는 형가가 진나라에 가기 전에 갑자기 끝난다. 고우영은 나중에 그린 '십팔사략'에서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다뤘다.  /https://blog.naver.com/dogabs11/221263302854

고우영이 1987년에 단행본으로 내놓은 만화 '역수의 시'. 형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만 고우영 본인의 그림이라기엔 작화 수준이 현저히 낮고, 이야기는 형가가 진나라에 가기 전에 갑자기 끝난다. 고우영은 나중에 그린 '십팔사략'에서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다뤘다. /https://blog.naver.com/dogabs11/221263302854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되는가? 아니, 형가가 정말 비수로 진왕을 겁박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진왕이 옛 연나라 땅을 돌려주겠다는 그 약속을 지켰겠는가? 애초에 연나라 태자 단의 플랜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허망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태자 단 플랜’의 모델은 자객열전의 맨 처음에 나오는 조말이었다. 조말도 칼을 ‘침’해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은 전국시대에 비하면 ‘낭만의 시대’였던 춘추시대의 상황이었다. 기원전 638년 송나라 양공은 강을 건너오는 초나라 군대를 보고서도 ‘적이 어려울 때 공격하는 것은 인의(仁義)가 아니다’라며 구경만 하다가 다 건너온 적군에게 패했다. 기원전 506년 초나라의 신포서는 오나라 군사에게 수도가 함락되자 진나라로 가 7일 동안 궁성 벽에 기대 통곡한 결과 지원군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679년, 앞서 나온 조말의 겁박 뒤 제환공은 불쾌해진 나머지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걸 본 제환공의 대표적인 신하이자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중이 점잖게 말렸다. “작은 이익을 취하려다 제후들에게서 신뢰를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특히 말기로 가면 이런 시대가 아니라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시대였다. 약육강식 이전투구의 시기였다는 얘기다. 조말의 겁박 같은 일이 통할 리가 없었다. 형가의 거사 33년 전인 기원전 260년 진(秦)과 조(趙)의 장평대전에선,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숫자지만 승자인 진나라 장수 백기는 조나라 포로 45만명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갱살(坑殺)했다. 10배 과장됐다고 해도 4만5000명이다.

김병준 교수는 분석한다. 사마천이 자객열전에서 전저, 예양, 섭정을 차례로 등장시킨 것은 모두 마지막에 연 태자 단을 ‘형편없는 자’로 쓰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자객들은 모두 후원자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는 것이고, 후원자는 그 자객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양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일부러 앞뒤를 바꿈)”는 천고의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연 태자 단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거사를 계획했고, 무엇보다 형가를 제대로 알아주지도 못한 ‘찌질이’였다고 밝히는 것이 사마천의 서술 목적이었다는 얘기다.

중국 시안(長安) 병마용갱 근처에 있는 진시황 석상. 본 사람들마다 "참 인자한 모습으로 만들었다!"며 탄식하기 일쑤다.

중국 시안(長安) 병마용갱 근처에 있는 진시황 석상. 본 사람들마다 "참 인자한 모습으로 만들었다!"며 탄식하기 일쑤다.


아무튼 곧바로 진왕 정이 연나라에 대한 복수 공격을 감행해 연나라는 멸망했다. 연나라 왕은 태자 단의 목을 잘라 사태를 무마하려 했지만 진왕은 그대로 군사를 밀어붙였다. 연나라의 멸망은 무엇을 의미하나? 진나라가 연나라 동쪽에 있던 나라와 국경을 맞닿게 됐다는 뜻이다. 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형가의 거사를 사실 한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250년 넘게 지난 옛날 사건을 지금 와서 재해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김병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한 글자라도 제대로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삼국지 인물론을 집필한 한형수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AI 시대가 된다 해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AI는 결국 그 인간의 본성을 닮아갈 것이다. 벌써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에는 인간처럼 짜증을 내고 있지 않은가? 그 ‘인간 본성’이 얼마나 파노라마처럼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며 깊고도 고금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지 잘 드러내는 고전 중의 고전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일 것이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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