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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TSMC가 알려주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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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환 전국팀장

정일환 전국팀장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 중심가에서 차로 한 시간여를 달리면 닿는 신주과학공원(Hsinchu Science Park). 10년도 넘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지만 TSMC를 필두로 UMC(파운드리 세계 3위), ASE(패키징 세계 1위), 미디어텍(설계 세계 4위) 등 글로벌 선두 기업이 꽉꽉 들어찬 반도체 클러스터의 위용은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대단했다.

물론 그때만해도 TSMC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이른바 ‘용팔이’들이 팔아먹던 대만제 그래픽카드 회사에 불과했지만, 첨단 부품 기업이 밀집한 산업단지가 당시 ‘전자 강국’으로 불리던 대만의 원동력임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만났던 대만 기업인들과 관료들은 신주과학공원이 대만을 시스템 반도체 리더로 끌어올린 힘으로 집적효과와 더불어 인재 유턴, 산학협력을 꼽았다.

대만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타이페이에서 가까운 위치에 TSMC를 필두로 팹리스·소부장(소재·부품·장비) 등 500여개 기업이 한데 모였으니 집적효과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해외에 나가 있던 기술인재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취했던 정책들도 빼놓을 수 없다. 대만정부는 주거, 병원, 학교, 레크리에이션 센터, 공원 등을 완비해 일과 생활, 여가를 통합한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한다. 덕분에 해외에서 귀국해 신주과학공원 내에 기업을 차린 인재만 4,000명이 넘는다.

대학들도 합세했다. 신주과학공원 프로젝트를 설계한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부터가 청화대 총장 출신이니 청화대 출신 인재들을 중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통대 등 가까운 위치에있던 대만 명문대들이 과학기술 인재들을 공급했다. 여기에 ITRI(산업기술연구원)은 각 대학 연구소와 대학원생들과 연계해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신주과학공원의 성공 방정식을 최근 불거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새만금 이전 논란’에 대입해 보자. 새만금 이전을 찬성하는 쪽은 전기 공급의 안정성과 지역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이다.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전력을 먹는 산업이고, 수도권 집중을 완화해야 한다는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신주과학공원이 보여준 사례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가 전력 단가나 부지 면적 같은 단일 변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준다. 반도체 산업은 ‘전기 산업’이기 이전에 ‘사람 산업’이며, 더 정확히는 ‘생태계 산업’이다.

신주과학공원의 핵심은 수도 타이페이에서 한 시간 거리라는 입지였다. 정치·행정·금융의 중심과 가깝다는 것은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의사결정 속도, 정책 조율, 글로벌 고객과의 소통, 외국 인재의 생활 적응까지 모두 직결된다. TSMC가 세계 최고 파운드리로 성장한 배경에는 기술력뿐 아니라, 이런 압축된 의사결정과 네트워크의 힘이 작동했다.


인재 유턴 정책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만 정부는 “공장을 지어주면 사람이 온다”는 단순 논리를 버렸다. 대신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먼저 만들었다. 주거, 교육, 의료, 문화, 여가가 함께 설계된 공간이었기에 실리콘밸리에 있던 인재들이 가족을 데리고 귀국할 수 있었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결국 연구소와 팹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다.

산학연 연계도 마찬가지다. 신주과학공원은 청화대, 교통대, ITRI라는 이미 검증된 연구·교육 인프라 위에 구축됐다. 신입 엔지니어부터 박사급 연구자까지 끊임없이 공급되는 구조가 있었기에 기업들은 장기 투자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새만금으로 이전하자는 주장은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 새만금은 전력과 부지 면에서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인재들이 가족과 함께 이주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생활·교육·연구 환경을 갖췄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지역균형발전 역시 ‘첨단 산업을 어디에 꽂아 넣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지역이 첨단 인재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신주과학공원은 낙후 지역에 산업을 이전해 성공한 모델이 아니라, 이미 경쟁력을 갖춘 공간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 국가 경쟁력의 엔진으로 만든 사례다.

해법은 역할 분담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인 클러스터는 신주과학공원처럼 수도권의 인재·대학·연구소·기업 집적도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되, 새만금은 전력·재생에너지·대규모 부지를 살린 후공정, 에너지 다소비 산업, 혹은 차세대 실증 단지 등으로 특화하는 이원화 전략이 현실적이다.

신주과학공원이 알려주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해법은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속도다. 1976년 처음 제안됐을 당시 대만도 똑같이 어디에 조성할지를 놓고 논쟁이 일었다. 대만 정부와 정치권이 신속히 논란을 정리하고 위치를 확정했지만, 신주과학공원이 문을 열기까지 4년의 공사기간이 소요됐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슈퍼사이클을 맞았다. 하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골든타임이 끝나기 전에 다음 먹거리를 시작해야 한다.

전기는 끌어올 수 있지만, 사람과 생태계는 하루아침에 옮길 수 없다. 이 단순하지만 무거운 진실을 외면한 채 정치논리에 매몰돼 시간을 허비한다면 결국 또 하나의 값비싼 실험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이투데이/정일환 전국팀장 기자 (wha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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