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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8] 여보! 거긴 어떤가요?

조선일보 윤명숙 작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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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생일, 분당에 있는 묘소를 찾아간다
폐암 3기 진단 받고 물감을 주문한 화가
그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편이었을지도

남편 그리울 땐 미운 짓거리를 기억하고
죽기 전에 내 손을 잡고 한 말을 떠올린다
추운 날 묘소에서 본 나비에게 말을 건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오늘이 남편 생일이다. 아이들 전화를 기다렸으나 문자도 없고 조용하다.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분당에 있는 남편 묘소를 찾아갈 예정이다. 혼자 그곳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동네 꽃집을 찾아갔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온 모양이다. 꽃은 포기하고 휴대폰으로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그는 80세 때 살을 뺀다고 나대다가 뇌경색이 온 적이 있다. 그 후로 80㎏에 육박하던 체중이 매년 조금씩 저절로 줄더니 이번에는 또 당 수치가 높아졌다. 그렇게 병원을 들락거리는 와중에도 그는 헐렁해진 바지 허리를 줄여 오라고 명품 수선집에 나를 수도 없이 보냈다. 어느 틈에 남편은 키도 작아져서 허리뿐 아니라 길이도 줄여야 했다. 그이는 입을 기회도 없는 그 수많은 바지에 왜 그리 집착했을까? 그뿐인가? 머리를 삭발한 후에는 모자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안경, 만년필, 반지 등 순전히 명품 모으는 재미로 사들이는 물건들만 잔뜩 늘었었다.

모처럼 산소에 가는 마누라가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남편 험담에 빠지다니, 쯧쯧! 혹시 남편 흉상 부여안고 꺼이꺼이 청승 떨까 봐 미리 워밍업 하는 게야?

길이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이 추모 공원에는 건강이 나빠지기 전 남편이 직접 발품을 팔아 고르고 골라 구매한 땅에 직접 디자인해서 완공해 놓은 가족 봉안묘가 있다. 나지막한 돌담을 따라 남천과 목단을 심어 아담한 정원같이 보인다. 남편이 직접 세워놓고 간 그의 흉상을 닦기 위해 나는 준비해 간 젖은 수건을 꺼낸다. 잔디 위에 흩어진 낙엽도 그러모은다. 허리를 펴니 뒷산이 온통 붉은 단풍으로 뒤덮여 있다.

남편은 폐암 3기라는 진단을 받고도 캔버스며 물감을 잔뜩 주문했다. 못마땅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것이 자기 나름대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요즘 들어 나의 건강이 나빠지고부터다.

남편은 암과의 투쟁을 포기하고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작품 제작에만 쏟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지냈다. 몇 번인가 넘어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것도 없어 보였는데, 3개월 후에 폐를 검사해 보니 암세포가 조금 커졌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그의 뒤치다꺼리를 해낼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다가 그만 둘이 함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를 안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결국 아들을 불러 그날 밤 화장실 방문은 해결했지만, 앞으로도 계속될 일 같아서 며느리가 수소문한 간병인을 불러들였다.

둘만 사는 집에 남이 들어와 얼쩡거리는 건 끔찍한 일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덩치 큰 60대 간병인 남자와 지내 보니 의외로 괜찮았다. 그 사람은 전생에 우리와 무슨 인연이 있기에 남편의 마지막 작품 제작을 10개월 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병원 로비에서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었을 때도 유일하게 옆을 지킨 사람이 되었을까.

이곳 시니어하우스로 들어온 지 어느새 2년 가까이 됐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들면 정면 벽에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낮에는 침실에 들어갈 일이 별로 없고, 자러 들어갈 때도 벽에 전기 스위치를 내리고 깜깜한 방을 더듬거려 침대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편의 웃는 사진을 볼 기회는 거의 없다. 어스름새벽에 일어나면 비실비실 거실로 나와 생수 한 잔 마시고 어김없이 소파에 엎어져 숨을 고른다. 부정맥 환자라고 다 그렇진 않겠지만 난 하루 중 이때가 제일 괴롭다. 숨도 많이 차고 명치도 답답하다. 내 사정이 이러하니 일부러 남편 사진을 보며 청승을 떨 여력은 없다. 그래도 보고 싶을 때는 그 앞에 가 위로를 받기도 하는데, 많이 슬퍼지면 남편의 미운 짓거리를 일일이 기억해 내고 그리움을 참아낸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따뜻한 옷을 찾다가 남편이 오랫동안 입어서 낡아빠진 셔츠가 손에 잡혔다. 이사 오기 전 옷 정리하면서 명품이라고 주워 온 것이다. 냄새를 못 맡은 지 오래됐건만 깜박 잊고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댔다.

간병인을 집에 들인 후 그의 조언대로 우리는 의료 침대를 새로 사서 거실에 들여놓았다. 그런데 남편이 하룻밤 침대에서 자 보더니 불편하다며 도로 내 옆 침대로 옮겨왔다. 간병인을 두고도 밤에 소변을 보기 위해 여러 번 일으켜야 하는 일이 다시 내 몫이 되었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는 날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 쏟아지는 잠을 간신히 참고 누워 있는데 남편의 손이 더듬더듬 내 쪽으로 넘어왔다. 내 손을 꼭 잡더니 그가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자는 척하고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면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남편을 향한 오랜 원망이 희미해졌다.


여보! 당신은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하기 어려웠소?

담장에 걸터앉아 남편의 묘소 위 푸른 하늘 저편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을 멀뚱히 바라본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비 아니면 새의 방문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왔다 갔다고 믿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정말 그는 흰나비가 되어 여린 날개를 팔랑대며 우리를 지켜보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 나비에게 묻고 싶다. 여보! 거긴 어떤가요?

가을 끝자락 추위에 나비를 기다리는 할망구가 여기 있다! 나는 두리번거리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윤명숙 작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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