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년 9월 영국 군함 웨이저호는 장교와 수병 250명을 태우고 포츠머스에서 출항한다. 전쟁 중이던 스페인의 선박을 포획하는 비밀 임무를 띤 소함대였다. 그러나 이듬해 거대한 파도를 이기지 못한 웨이저호는 남대서양 파타고니아 앞바다의 한 섬에 난파된다. 생존자는 81명. 이들은 웨이저호의 잔해를 가져다 임시변통으로 배를 만들어 다시 항해한다. 거친 폭풍과 해일, 열악한 배의 환경 속에서 50명이 넘는 이들이 죽는다. 목숨을 부지한 약 30명의 선원이 브라질 남동부 해안으로 배와 함께 떠밀려 온다. 지옥 같은 환경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사건이 거기서 끝났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생존기로 남았을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몇개월 뒤 칠레 남서쪽 바다에 또 다른 웨이저호의 생존자 세 명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 앞서 도착한 생존자들에 대해 “영웅이 아니라 반란자”라며 폭로에 나섰기 때문이다. 사건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닫는다.
<웨이저>는 1741년 난파된 영국 군함 웨이저호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이다. 추후 도착한 생존자 세 명엔 웨이저호의 선장이 포함돼 있었다. 선장 무리는 앞서 도착한 이들이 군대의 규율을 어기고 배를 약탈해 도망친 반란자라 주장한다. 앞선 생존자들은 선장이 위기 상황에서 선원들을 보호하지 않고 살해했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선원들이 겪은 극한의 상황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난파된 섬에서 이들은 서로 분파를 나눠 약탈하고 죽였다. 일부는 인육을 먹는 인간성 파괴의 지경에 도달하기도 했다.
1741년 난파된 영국 군함 웨이저호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 <웨이저>의 작가 데이비드 그랜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사건이나 사람을 발굴해 소개해왔다. ⓒ Rebecca Mansell |
1741년 영국 난파선 선원들의 실화
두 무리로 나뉘어 돌아온 생존자들
서로의 야만 폭로하며 ‘진실 게임’
극한 상황 배후엔 제국주의 그림자
저자는 웨이저호의 선원을 만나보지도, 실제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지만 방대한 자료를 통해 그 사건을 구현해낸다. 웨이저호와 관련된 군사재판 기록, 사건을 목격한 이들이 남긴 일기와 일지 등을 통해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글을 풀어낸다. 논픽션이지만 상상과 묘사가 한껏 가미된 소설처럼도 읽힌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만나본 적도 없을 웨이저호의 한 선원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은 이렇다. “그의 푸른 눈만 보아서는 속내를 알 수 없었고, 자신이 믿는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작가인 데이비드 그랜의 작품을 서사형 논픽션(narrative nonfiction) 혹은 논픽션 소설(nonfiction novel)로 볼 수 있는 이유다. 작가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남긴 사건이나 사람을 발굴해 소개해왔다.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잃어버린 도시 Z>,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원작 <플라워 문> 등을 썼다. <잃어버린 도시 Z>는 아마존으로 모험을 떠났던 영국의 전설적인 탐험가 퍼시 포셋의 이야기를 담았다. <플라워 문>은 1920년대 미국 중남부 도시를 배경으로 석유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인디언 부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실화에서 출발한다. 두 작품 역시 <웨이저>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이나 잘 구성된 소설처럼 보인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 볼 수는 없다. 웨이저호 사건은 극도의 상황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스페인과 해상 패권을 다투던 영국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장 무리와 반란자 무리가 서로 폭로하며 군사재판이 이어지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웨이저호가 출발부터 스페인이 싣고 가던 보물 선박을 나포하려던 불법적인 시도 위에서 시작됐던 점, 웨이저호 선원들의 살인과 반란 등이 영국 해군의 명예로운 이미지를 실추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 웨이저호 선원들을 야만의 상태로 내몬 것은 제국주의 국가 영국 그 자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웨이저호 사건은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선원들이 홉스적 자연 상태,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볼테르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생존자들의 행동을 분석해 법과 사회질서가 부재한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잔혹함을 논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거짓과 진실이 섞인 선원들의 주장이 오가는 상황에서 책의 시작이 “유일하게 공정한 목격자는 태양이었다”는 문장인 것은 의미가 깊다. <웨이저>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협업으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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