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시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은 덴마크의 북극 영토인 그린란드를 병합하기 위한 미군 활용 가능성을 언급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인 유럽 국가들을 발칵 뒤집어놨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미국 및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가 더 이상 예측 가능하거나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
<21세기 지정학>은 오늘날 세계질서가 서구의 전유물이라는 신화를 반박하며, ‘미국 없는 세계’가 반드시 혼돈과 붕괴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통찰을 지난 5000년의 문명사를 되짚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서구 주도의 세계질서를 ‘보편적’으로 보는 통념을 해체하고, 과거부터 다원적이었던 세계질서로부터 미래에 대한 단서나 가능성을 찾아보는 ‘과거로 돌아가는 미래(back-to-the-future)’라는 논지를 풀어간다.
책에서 사용하는 ‘세계질서’ 개념은 권력 구조, 경제적 연결, 정치 사상, 리더십이 상호작용하며 인류의 안정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작동 방식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는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등 현대 질서를 형성하는 주요 가치들이 서구만의 독창적인 발명품인 양 내세워 이를 기반으로 국제적인 힘을 쌓아왔다. 책에선 고대 근동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수많은 ‘비서구’ 문명을 톺아보며 서구 중심적 편견을 깨부순다.
트럼프1년규탄 국제민중공동행동 조직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베네수엘라 공격을 규탄하고 있다. <21세기 지정학>은 오늘날 서구 중심 세계질서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며, ‘미국 없는 세계’가 반드시 혼돈과 붕괴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이다.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
고대 근동 ‘아마르나 체제’부터
동아시아 ‘조공 질서’ 등 다루며
서구 주도의 세계질서 통념 해체
다원적이던 과거 통해 미래 예측
미 중심 질서 21세기 후반엔 ‘흔들’
소수 강대국의 ‘다극 체계’ 넘어
글로벌 멀티플렉스의 세계 제시
이를테면 이미 기원전 14세기경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등이 이른바 ‘아마르나체제’ 아래 정교한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을 체결해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선구적 모델을 남겼다.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의 ‘만뎅 헌장’은 일찍이 인권과 개인의 재산권을 명시했으며, 대륙 전역에 형성된 무역 네트워크가 아프리카만의 국제적 질서를 지탱했다.
한국이 익숙한 동아시아 ‘조공 질서’도 책이 소개하는 세계질서 중 하나다. 삼국시대 한반도 왕조와 수·당의 전쟁에서 보듯 조공 체계는 단순한 복속 관계로 볼 수 없다. “중국의 문화적·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국가들에 무역 특권과 외교적 승인을 제공하는” 위계적 관계가 핵심이다. 선도적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식민지화하지 않고 안보와 무역 혜택을 제공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질서가 조공 체계와 먼 친척뻘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
근대 서구 세계질서의 출발은 ‘30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이다. 각 국가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는 원칙으로 확립한 이 합의는 현시대까지 세계질서를 뒷받침하는 외교 관계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이 평등의 원칙은 강대국 사이에만 균형을 만들었고,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노예제도와 같은 비유럽 세계에 대한 유럽만의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유엔과 같은 다자간 기구를 통한 세계질서 관리, 민주주의 촉진, 인권 옹호,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를 통해 다시 거론되는 먼로 독트린(19세기 서반구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미국 패권 정책),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침공 등에서 그랬듯이 미국은 언제든 자국 이익을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독재자들과도 긴밀하게 결속했는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도미니카 공화국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에 대해 “그는 개자식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미국 세계질서는 냉전 종식과 소련권 붕괴로 절정에 달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통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너무나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낙관주의를 펼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만에 이러한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에 이어 미국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전쟁을 치르게 됐고, 동시에 중국은 세계질서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책에선 미국이 로마제국처럼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미국이 자신들의 비전과 가치, 글로벌 협력기구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구축한 세계질서가 21세기 후반이면 더 이상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에 대해선 서구가 두려움을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힌 ‘일대일로’에서 보듯 중국의 역량 자체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린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는 소수의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는 ‘다극 체계’를 넘어선 ‘글로벌 멀티플렉스’이다. 관객이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감독, 배우를 선택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기업, 재단, 비정부기구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훨씬 더 많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이 전략적 방위를, 중국이 무역과 개발을,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하는 식이다. 저자는 뉴진스, BTS 정국 등 K팝을 언급하며 한국과 같은 중견 국가가 문화적 다양성을 주도하는 미래도 제시한다.
저자는 서구 패권이 흔들릴 때마다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사실 기득권의 편향된 입장에 불과하다고, 그 세계는 이전보다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한국에도 미래의 다원적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다른 상상을 제시하는 책이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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