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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외면 못하는 속깊은 형, 본인보다 역할을 더 사랑한 배우···배우 안성기와 함께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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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3일 고 안성기, 박중훈과 인터뷰 중인 배장수 경향신문 기자(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7년 1월 3일 고 안성기, 박중훈과 인터뷰 중인 배장수 경향신문 기자(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5년 젊은 배우와 새내기 영화담당 기자로 처음 만나
광고 촬영 겹치는 행사 참석 간청하자 일정 조정해주기도
조역을 맡아도 적극적으로 몰입했던 ‘참 연기자’


안·성·기. 저의 형·선배·스승이자 신앙인으로 대부(godfather)이십니다. 지난 5일 영면했고, 9일 천상으로 떠납니다. 1985년, 젊은 배우와 새내기 영화 담당 기자로 만나 성기형과 함께한 40년을 반추해 봅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1년 봄,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 마산에서 본 첫 영화입니다. 배우 안성기는 이 작품을 통해 만났지요. 이장호 감독의 스무 살 때 일기장 <모두 주고 싶다>도 이 작품을 계기로 읽었고요. 훗날 영화 담당 기자로 뛸 때 대화의 서두는 한동안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모두 주고 싶다> 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영화 홍보마케팅 전문 올댓시네마를 창립한 채윤희 대표(전 여성영화인모임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와의 오랜 인연도 이 일기장을 통해 맺었지요.

“너, 안성기 잘 알잖아.” “… 저는 잘 아는데 형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1985년 여름, 레이디경향 기획 회의 때 데스크는 제게 안성기 신혼일기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내 오소영 씨가 쓴 것이면 더 좋겠다는 첨언과 함께. 이후 저는 출근을 수유리에 있는 성기형 집으로 했습니다. 집 앞에서의 만남을 통해 청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고, 댁 전화번호도 몰랐으니까요. 얼마나 헛걸음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성기형을 통해 형수님이 원고지에 직접 쓴 신혼일기를 받아 들고 사옥으로 향하면서 싱글벙글했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1992년 레이디 경향 인터뷰 당시 배우 안성기와 아내 오소영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2년 레이디 경향 인터뷰 당시 배우 안성기와 아내 오소영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돌이켜 보면 성기형과의 인연은 각별했습니다. 성기형이 저의 초청을 들어주기 위해 CF 촬영 시간을 조정했던 일화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1996년 10월, 경향신문 창간 50주년 기념 리셉션을 앞두고 저는 편집국 문화부장님의 엄명을 받았습니다. 리셉션에 당대 최고 배우 안성기·강수연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데스크는 다른 분이었지만 말씀은 동일했습니다. “친하잖아….”

강수연님과 먼저 통화, 참석하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강수연님은 맺고 끊음이 분명해 이 한 번의 통화로 걱정을 붙들어 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기형은 참석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삼성 애니콜 CF 촬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가항력, 눈앞이 캄캄한 가운데 한 두 마디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섭외도 기자의 능력인데, 출판국 레이디경향에서 신문 편집국로 발령받은 뒤 처음으로 부담을 느낀 일인데” 운운한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성기형은 10분쯤 뒤에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10분이 왜 그리 더디 가는지, 하지만 기다림의 끝은 달았습니다. 성기형이 광고대행사에 전화, CF 촬영 시간을 조정한 겁니다. “참석할게.” CF 팀에는 죄송했지만, 성기형의 남다른 배려심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 영화 담당 기자들은 모두 이런 기억을 제각각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느라 성기형이 얼마나 힘들고 바빴을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는 2012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부가 되어 달라고 전화했을 때 성기형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지 않아 대부를 할 자격이 없다면서. 신부님께서도 안 된다고 하셨고, 저는 형이 견진을 받은 뒤에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대부를 먼저 하고 가급적 빨리 견진성사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형은 약속을 지켰고, 훗날 제 견진성사 때에도 저의 대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비둘기가 나는 십자가상을 선물로 주셨지요.

1995년, 배우 안성기가 영화 <태백산맥> 촬영 현장에서 사인해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5년, 배우 안성기가 영화 <태백산맥> 촬영 현장에서 사인해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기형의 마음 씀씀이는 CF 촬영 건보다 먼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 <태백산맥>(1994) 촬영 때 일입니다. <태백산맥>에 저는 김병재·이창세·송용덕 등 선후배 기자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보성군당 간부로 출연했습니다. 벽제 세트장에는 성기형도 와 있었습니다. 형은 민족주의자인 중학교 교사 ‘김범우’ 역을 맡았는데 이날 촬영이 없었습니다. 조감독의 착각으로 성기형이 늦잠을 잘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날렸다고들 했습니다. 형님이 화가 많이 났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저희를 도울 일이 있을 수 있다면서 돌아가지 않고, 촬영을 마친 초저녁까지 기꺼이 저희들과 동행한 겁니다.

저는 <태백산맥> 외 <축제>(1996) <취화선>(2002) <라디오스타>(2006) <부러진 화살>(2011) <주리>(2012) 등 성기형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습니다. 촬영 중 성기형에 대해 들은 일화는 너나없이 “그런 배우 없다”는 말로 시작하거나 마쳤습니다.


<취화선>에서 성기형은 주연인 장승업(최민식)이 아니라, 어린 장승업을 구해주고 그림 재능을 발견한 조력자 ‘김병문’역을 맡았습니다. 작고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인 데에다 많지 않은 출연료를 받고 기꺼이 동참해 준 배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화 담당 기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화입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한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한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재밌는 일화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1998)을 호남의 한 지방에서 촬영할 때입니다. 우천으로 촬영이 취소되는 바람에 스태프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 팀원들의 숙소에 성기형이 커피를 시켜줬습니다. 커피를 가져 온 직원에게 일행들은 기념으로 사인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빨리 빈 잔이나 돌려달라고 했답니다. 일행이 성기형을 가리키며 정말 모르겠느냐고 했고,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뒤 일행은 성기형에게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돌아온 답에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건 그만큼 내가 연기를 잘했다는 것이잖아. 극 중 안성기하고 이 방의 나하고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안성기가 아니라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한 영화인은 상대방을 배려했던 성기형의 행동들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니까 몸이 시간을 낸 것”이라고 하더군요. 박중훈은 최근 낸 수필집 <후회하지마>에서 성기형에 대해 “세상에 마음속 깊이까지 다 겸손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고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성기형이 돌아가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빙긋이 지은 미소 속에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시고 계셨을는지? “나뭇잎이 되라, 놓을 때가 되면 우아하게 떨어지는”이라는 한 시인의 시구(詩句)가 떠오릅니다. 성기형의 한결같은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배장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고(故) 안성기 배우의 빈소. 사진공동취재단

고(故) 안성기 배우의 빈소. 사진공동취재단


배장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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