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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재첩국 사이소~” 사라진 부산은 어떤 소리를 기억할까

조선일보 오성은 소설가·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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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잊고 지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예고도 없이 과거의 장면이나 소리가 되살아난다. 20대와 30대에는 하루살이처럼 살았던 탓인지 바로 어제조차 돌아볼 틈이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기억이 불어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새해 정오 무렵의 뒷산은 인적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흙길로 들어서자마자 산새 소리가 또렷해진다. 시간이 쏜살같이 느껴져 내 무의식이 과거를 불러내는 것인지, 과거를 들여다볼수록 시간이 더 바투 가버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머무를 과거의 한 장면이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새벽녘의 실금 같은 빛이 번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있었다.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재첩국 사이소’와 ‘재첩국’은 끊어지지 않는 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아침밥을 짓는 이에게 잘 들릴 수 있으면서 단잠을 깨우지는 않도록 부드러운 리듬으로 적당한 여운을 곁들여 내는 소리였다. 그러면 내 어머니는 냄비에 재첩국을 받아두었다가 온 가족이 깨면 다시 끓여 아침상에 올리곤 했다. 낙동강의 물길이 바뀌고 산업화로 탁해지면서 재첩이 점차 자취를 감췄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부산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던 시기, 골목골목을 누비며 뜨거운 국물을 팔던 재첩국 아주머니의 배달 서비스 역시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살았던 영도는 어디에서나 뱃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뱃고동은 길을 묻는 소리였다. 안개 속에서도 눈이 되어 주는, 귀로 밝힌 신호였다. 그러나 소형 선박용 레이더가 보급되면서 그런 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판장의 물밀대가 바닥을 세차게 긁는 소리나, 뱃머리의 타이어가 항구의 외벽을 짓이기는 소리, 밧줄이 낑낑거리며 가까스로 큰 배를 붙드는 소리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우리 동네의 소리였다.


아침 출근길에 셔터 문을 올리는 소리와 공중전화의 여닫이문에서 나던 고단한 쇳소리 같은 건 고대의 유물처럼 멀어졌다. 배달부가 툭 하고 문간에 종이 신문을 던지던 소리도 이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들은 제각각 고유한 존재가 남긴 목소리였다. 아침이 왔다는 자명한 사실, 누군가 이미 하루를 시작했다는 기척,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으리라.

산 정상에 오르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공사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완공된 건물도 보였고, 외벽을 새로 칠한 아파트도 보였다. 나는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그곳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것이다. 또 어떤 장면이 나의 기억에 남게 될까.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쓴 이후 널리 알려진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나도 그 말을 좋아하는 까닭은 어느 날 그 ‘소소함’이 소리나 장면의 형태로 되찾아오기 때문이다. 크고 엄청난 장면들보다 작고 소박한 장면이 나를 찾아와 주었을 때, 나는 확실히 조금 더 행복한 표정이 된다. 도시도, 국가도, 세계도 점차 거대해져 가는 것만 같은 요즘이다. 2026년의 부산은 어떤 소리를 잃어버리고, 또 어떤 소리를 간직하게 될까.

[오성은 소설가·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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