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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김상운]베네수엘라 민주주의 저버린 ‘美 우선주의’ 민낯

동아일보 김상운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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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 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와 에드문도 곤살레스, 임시 대통령 델시 로드리게스(왼쪽부터). 미국은 로드리게스의 권력 승계를 사실상 승인했다. AP 뉴시스

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 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와 에드문도 곤살레스, 임시 대통령 델시 로드리게스(왼쪽부터). 미국은 로드리게스의 권력 승계를 사실상 승인했다. AP 뉴시스


김상운 국제부 차장

김상운 국제부 차장

“마두로의 핵심 측근인 델시 로드리게스가 권력을 유지하는 건 ‘마두로 없는 마두로 체제’의 연장일 뿐이다.”(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에드문도 곤살레스)

“미국의 (로드리게스) 선택은 석유 공급 안정과 질서 유지만을 고려한 ‘냉혹한 거래’다.”(망명 중인 안드레스 이사라 전 베네수엘라 관광부 장관)

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한 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을 사실상 승인하자, 베네수엘라 야권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이 마두로 정권에서 외교부 장관, 석유부 장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며 독재체제를 떠받쳐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오빠 호르헤 로드리게스 국회의장은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 때 부정선거를 총괄 기획해 마두로의 3선을 가능케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간) 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로드리게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베네수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ke Venezuela Great Again)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기꺼이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로드리게스 체제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어 다음 날 미 시사주간지 디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로드리게스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뉴욕의 구치소에 수감된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말만 잘 듣는다면 일단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반면 야권 지도자로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 대해선 “그녀는 나라 안에서 지지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베네수엘라를 이끄는 건 매우 힘들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영토 주권 침해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마약 테러범에 대한 사법적 단죄와 독재 종식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행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앞서 이번 체포 작전을 주도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5일 X에 “베네수엘라 국민을 억압해 온 잔혹하고 불법적인 통치자 마두로 체포는 그의 폭력적 통치로부터 도망쳐 온 나의 친구와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미국의 로드리게스 승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미국의 핵심 외교 원칙을 스스로 허물었다는 점에서 향후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넌 청교도 정신을 강조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다른 나라들에 전파해야 한다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를 금과옥조처럼 여겨왔다. 실제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미 국무부는 매년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인권 실태를 조사해 보고서로 펴내고 있다.


5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마차도, 곤살레스 등 야권 지도자들에 대해 “군부, 경찰, 마약 카르텔의 저항 속에서 베네수엘라 정국을 관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대신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을 비롯한 마두로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과도정부를 구성하면 베네수엘라가 단기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키워 온 중국을 견제하는 것과 석유 확보라는 자국 이익을 위해 베네수엘라 정국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로드리게스 카드를 택하기로 한 것. ‘미국 우선주의’를 위해 민주주의 수호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가치와 전통을 포기한 셈이다.

사실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 당시 미 정부도 국익과 민주주의 사이에서 전자를 택했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당시 반란군 진압을 만류한 이유에 대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에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등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다. 민주주의 붕괴보다 체제 안정과 그로 인한 미국의 안보이익을 우선시했다는 얘기다. 미국의 이런 기조는 이듬해인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도 유지되면서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지금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 없는 마두로 체제’의 연장을 추구한다면 중남미에서도 미국의 권위는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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