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호미곶 '상생의 손' [사진/임헌정 기자] |
(포항=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잿빛 구름 사이로 해가 불현듯 고개를 내밀었다. 뒤늦은 태양의 비상. 빛은 호미곶의 거대한 청동 손가락 끝에 닿는다.
손끝의 간절함. 바닷속 손은 육지의 또 다른 손을 잡고 싶다.
포항 호미곶의 두 손은 올해도 아침마다 떠오르는 빛을 기다린다.
◇ 손가락 사이로 떠오른 태양
인간의 손은 무한한 상념을 일으킨다. 일에 지친 노동자의 거친 손, 늙은 어머니의 주름진 손,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 없는 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려는 연인의 손.
무언가를 쥐어보고, 만져보고, 느껴보려고 뻗은 손에는 그 어떤 신체에서도 볼 수 없는 에너지가 가득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간절함이 오간다.
호미곶 '상생의 손' [사진/임헌정 기자] |
포항 호미곶에 있는 '상생의 손'은 인간의 손에 대한 이 모든 상상을 허락한다.
포항 호미곶의 일출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태양은 두 번의 극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한 번은 수평선 위에서, 또 한번은 청동 손가락 사이에서.
수평선에 구름이 끼었다고 낙망해선 안 된다. 이날처럼 손가락은 기적같이 태양을 불러올리기도 한다.
해가 떠오르자 한기와 허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호미곶 광장에 있는 새천년기념관과 국립등대박물관도 식후경. 다슬기 해장국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룡포항 전경 [사진/임헌정 기자] |
◇ 구룡포항의 윤슬과 일본인 거리
주목적은 일출이지만, 온 김에 몇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미곶에서 차로 10여분 내려오면 과메기 산지로 유명한 구룡포항이 있고, 그곳에 일본인가옥거리가 있다.
1906년 일본 가가와현의 어선 80여척이 고등어 떼를 따라 구룡포에 온 뒤 일본인들이 구룡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가옥이 들어섰고 상점이 번성했다.
일본풍 목조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나온다.
1920년대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의 살림집이었던 이 2층짜리 목조주택은 일본식 가옥의 구조적 특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 [사진/임헌정 기자] |
앞마당엔 남천과 피라칸사스의 붉은 열매가 잠시 겨울을 잊게 한다. 입구 바로 앞 향나무 앞에 심은 작은 동백은 이제 막 겨울 맛을 본 듯 싱그럽다.
거리 중앙에서 구룡포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멀리 구룡포항이 차갑게 빛나고 윤슬은 눈부시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각과 충혼탑, 일제강점기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 등에 공을 세운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를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송덕비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뒤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해 비문 내용을 알 수 없다. 시멘트로 덧칠한 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
시멘트로 덧칠된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사진/임헌정 기자] |
이곳의 소나무들은 재선충병으로 거의 다 고사 직전의 모습이다. 재선충병이 매우 심각한 지역 중 하나가 포항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 포항 브랜드가 된 연오랑세오녀
이제는 포항의 도시브랜드가 된 신화가 있다. 한국의 대표적 일월신화인 '연오랑세오녀'다.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와 세오 부부가 일본으로 가게 되면서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가, 일본에서 보내온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유일한 일월신화인 이 이야기는 포항의 테마공원으로 만들어져 여행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표지판 [사진/임헌정 기자] |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명당에 지어져 신화와 무관하게 산책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관광포인트가 됐다.
공원 안에는 신라의 사라진 빛을 되찾아 준 세오녀의 비단을 기념하는 전시관 '귀비고'가 있다. 세오녀가 달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만큼 이곳의 주제는 '달'이다.
우리는 해의 그림자에 가린 달의 존재를 종종 잊지만, 달은 언제나 어둠을 밝혀주고 꿈과 비밀을 들어주는 소중한 존재다.
전시관에 들러보면 달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바꿀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있는 쌍거북바위 [사진/임헌정 기자] |
◇ 포항에 운하가 있다
반신반의했다. 웬 운하? 직접 보니 꽤 근사하다. 2014년 건설된 포항운하의 길이는 총 1.3㎞. 이 운하로 형산강의 물길이 복원됐다.
굽이굽이 이어진 수로 위로 유람선도 다닌다. 운하의 폭은 13∼25m. 배를 타고 손을 뻗으면 양옆의 길이 닿을 듯 가깝다.
유람선을 타고, 물길을 따라 걷고, 아치형 다리를 건너고, 주변 건물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좋을 것 같다.
포항운하를 누비는 유람선 [사진/임헌정 기자] |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포항의 명물 죽도시장도 구경할 수 있다. 동해안 최대 규모의 어시장에서는 물회, 돌문어, 과메기 등 포항 특산품들을 맛볼 수 있다.
시장 골목을 한참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를 위해 한겨울 제철인 과메기를 조금 샀다.
알배추 위에 돌김 한 장을 깔고 다시 물미역과 꼬시래기, 쪽파, 마늘을 얹은 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과메기 한 점을 초장에 찍어 올려 입에 넣으니 포항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제철 과메기다.
죽도시장의 과메기 [사진/임헌정 기자] |
◇ 두손의 간격
영일대해수욕장을 지나 해상 스카이워크를 걷는다. 해가 저물고 있다. 영일만의 윤슬도 황금빛으로 변해 간다.
건너편 호미반도 포스코의 굴뚝이 수평선 위에 희미한 실루엣을 그린다.
저 멀리 다시 호미곶 상생의 손을 떠올린다.
김승국 조각가의 이 작품에 대해 바닷속 손과 육지 손 사이에 있는 안내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손의 형상과 어우러진 성화대는 지난 천년이 극단주의와 양극화 시대이며 갈등과 배제의 '한손의 시대'라면, 새 천 년은 시간과 공간,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공, 문명과 자연이 화해하고 상보하며, 함께 사는 상생의 '두손의 시대'라는 기념 정신을 상징한다"라고.
두손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새 천 년에 두손의 간격은 과연 잡을 만큼, 아니 손끝이 닿을 만큼이라도 좁혀졌을까.
하늘에서 본 포항 해상 스카이워크 [사진/임헌정 기자]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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