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나는 새해를 앞두고 잠시 핀란드에 갔다. 전쟁통에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가 쉽지 않아, 그곳에 사는 어머니를 핀란드라는, 노르웨이와 러시아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핀란드에서 우연히 한 평범한 20대 청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겉보기에는 매우 얌전한 그는 극우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비서구권 이민자들의 입국을 극구 반대하면서 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유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흔히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불렀지만, 이 청년은 소부르주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고졸 출신의 노동자였다. 그와 또 다른 수많은 핀란드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극우 정당인 핀인당은, 지난 총선에서 20%의 득표를 기록했다.
나는 이 청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백인 고졸 노동자들의 66%, 즉 그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도널드 트럼프도 머리를 스쳤다. 더 가까이는, 취직난 속에서 가난한 젊은 남성의 일부가 참여하는 서울의 극우적 ‘혐중’ 집회들이 생각났다. 더 멀리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포그롬(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등 박해)이라 불리는 1931년 ‘만보산 사태’에 대해 읽은 책과 논문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중국인 학살에 나선 조선인들의 다수는 ‘소부르주아’라기보다는 무직자나 이런저런 일터를 떠도는 ‘자유노동자’들이었다. 포그롬이라는 말이 연상되자, 어머니한테서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1917년 혁명 이전인 어린 시절에 살았던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에서 유대인 포그롬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유대인 소수자의 학살에 나선 슬라브인 다수자들 역시 평범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유대인을 죽인다고 해서 제정 러시아 민초들의 끔찍한 가난이 나아질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자본과 전문적 기술을 가진 유대인들이 포그롬을 피해 미국 등지로 떠나면서 러시아 경제는 더 큰 손실을 보았다. 대공황으로 직격탄을 맞은 1931년의 조선 노동자들에게도, 학살로 인해 중국인이 조선을 떠나 인구가 줄어드는 일은 큰 이득이 되지 않았다. 잠시 취직이 용이해질 수 있었겠지만,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중국인은 약 7만명에 불과해 큰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적었다. 오늘날 ‘혐중’ 집회로 중국인 관광객 수가 크게 줄어들면, 소매업이나 숙박업, 관광업 고용이 감소할 뿐, 한국 경제나 사회의 약자들에게 득 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트럼프에게 몰표를 준 백인 고졸 노동자들은, 고율 관세가 불러온 물가 인플레이션으로 이미 고통받고 있다. 핀란드의 저임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비서구 이민자들 역시, 위에서 말한 그 극우 청년을 포함한 핀란드인들이 누리는 풍요와 복지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계급적인 이해관계의 차원에서 순전히 손실만을 초래하는 극우적 배타주의에, 특히 객관적으로 노동계급에 속하는 일부 젊은 남성들이 도대체 왜 빠져드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 사이에서 배타주의가 만연하는 조건은 다음 세가지이다. 첫째, 사회적 위기와 불안이 실질적으로 체감돼야 한다. 혁명을 앞둔 제정 러시아와 신자유주의 위기 속의 오늘날 구미권이나 한국, 그리고 대공황 이후의 조선은 모두 극도로 불안한 사회였다.
둘째, 대중 속의 어떤 특정 집단이 실질적으로 사회·경제적 신분의 강등을 경험할 때,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배타주의로 기울 위험성이 크다. 미국인 백인 고졸 남성 노동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 60년간 미국 제조업 고졸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거기에 주요 대도시의 주거 가격은 몇곱절 폭등했다. 탈산업화로 과거의 대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의 제조업 노동자와 그 후손들이 조건이 훨씬 더 나쁜 서비스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백인 남성일 경우, 비백인 내지 여성 고임금 대졸 근로자들을 서빙하며 과거의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게 해서 이 집단이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된 것이다. 소위 ‘이대남’들의 경우도, 결국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한국 현대사 속 최초의 세대라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낀다. 여성들의 학력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과거에 만만하게 여겼던 중국인들이 이제 “돈을 쓰러 오는” 관광객의 신분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적인 신분 강등을 경험하는 젊은 남성들은, 왜 그 불만을 사회적 상위자도 아닌 종족적 타자를 상대로 표출하는가. 여기에 바로 배타주의 만연의 셋째 조건이 작용한다. 해당 사회의 공식 담론에서 ‘국가’나 ‘국민’ 서사가 우위를 점하고, 언론이 배타주의를 암묵적 내지 명시적으로 부추길 때 극우주의는 쉽게 확산된다. 창간 이후부터 동아일보 등이 재조선 중국인들을 ‘조선인의 경쟁자’나 ‘아편 밀매꾼’ 등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지 않았다면 ‘만보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보수 매체들이 중국을 ‘협업 파트너’가 아닌 ‘경쟁국’이나 ‘위협’으로 규정하는 담론은 ‘혐중’의 범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픈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학교에서 인권 관련 내용을 착실히 학습하는 유럽연합의 복지국가들에서도 인종적 배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극우 정당들은 평균적으로 25%의 지지를 얻는다. 복지망이 허술하고 특히 젊은 남성들의 절망이 훨씬 더 강한 한국에서는, 그 수치가 잠재적으로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2025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74%가 강경 우파 후보들을 지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이 현상은 ‘혐중’ 정서를 타고 앞으로 더더욱 더 심화될 우려가 상당하다. 민주주의와 다민족 사회를 지향하는 여론 주도층은, 현 상황에서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인권과 관용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신자유주의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혐중’과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은 훨씬 더 크게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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