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튤 준불(가운데)이 2023년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한 연극 '신파의 세기'. /서울문화재단 |
공연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뒤풀이를 하다가 한 선배가 공연을 잘 보고 갔다는 지인들의 후기를 전해주었다. 내 또래의 다른 배우에게는 ‘어떤 장면에서 어떤 연기를 할 때 어떻게 좋았다’는 구체적인 코멘트를 해주었다. 반면 내게는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다들 깜짝 놀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전날 인터넷에 올라온 공연의 관람평에도 ‘베튤 배우가 한국말을 잘한다’는 후기가 있었다. 돌연 선배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저는 이번에도 한국말만 잘한 건가 봐요. 나도 정성을 다해 연기한 건데...”
지금껏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면서 ‘한국말을 잘한다’는 코멘트만큼은 빠짐없이 들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후기가 ‘한국말 잘한다’로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향한 반응이 화술이나 연기 등 배우로서의 역량을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어떤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는지보다는, 그저 ‘외국인이 한국어를 해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잘하고 싶었던 연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튀르키예 출신이라는 표면적인 정체성만 남았다. 심지어 28년간 한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 외국인이라는 표면적 정체성은 더는 본질적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연기에 대한 품평이나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공연이 의도한 바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닿았는지 알고 싶었다. 공연에 참여한 창작자로서, 내가 하고 있는 연기가 효과적이고 적절한지 가늠하고 싶은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내 일을 잘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말을 잘하는 것에 가려서 공연의 의도나 배우로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만다.
정체성은 출발점이지 결론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요약하는 데 익숙하다. 모든 것이 정체성으로 환원될 때, 오히려 정체성에서 출발해서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는 축소되고 만다. 이 아이러니 앞에서 무수히 실패해 왔지만, 그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 오늘도 어김없이 무대에 선다. 한국말을 조금 덜 잘해야 할까 고민하는 대신, 언젠가 하고 싶은 창작자로서의 말들이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면서.
[베튤 준불·배우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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