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있어서 결단의 순간이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는 도식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이 체제, 이 분단, 이 긴장은 과연 우리 의지인가’란 질문을 공적으로 제기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민주주의는 위험한 자유다. 한반도의 미래 역시 이 위험 감수에 대한 물음이 새해 정담의 첫자리에 놓여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풍경은 나라마다, 사람마다 참으로 다채롭다. 서울에서는 제야에 종로 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리고,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니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를 연주한다. 빈에서는 빈 필하모니의 신년음악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에 맞춰 관객들이 손뼉을 친다. 대서양의 화산섬 마데이라에서는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에서는 자정 종소리에 맞춰 12알의 건포도를 먹으며 새해 행운을 빈다.
한국은 또 다르다. 양력 새해에는 해돋이를 보며 덕담을 나누지만, 많은 이에게 ‘진짜 새해’는 여전히 음력설이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며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된 것처럼 느낀다. 이렇게 새해를 맞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새해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 언론의 관심에서조차 멀어진 가자지구의 참상은 새해를 맞는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각국의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이제는 끝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지만, 현실은 여전히 무겁다.
한국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난 한 해, 내란 사태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며 사회 전체가 큰 혼란을 치렀다.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동시에 과거로 돌아가자는 구호도 여전히 들린다.
자정(子正), 즉 제야의 순간은 묘하다. 끝난 해와 시작될 해가 맞닿아 있는 이 시간은 단절이면서 동시에 연속이다. 이 ‘순간’에 대해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정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인간이여, 주의하라! 깊은 한밤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들었다. 깊은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 자정은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말 거는 긍정의 순간이라는 뜻이다.
이 생각은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도 이어진다.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순간을 비어 있는 현재가 아니라, 억눌렸던 과거가 구제될 수 있는 ‘충만한 지금’으로 보았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 역시 순간을 완결이 아니라 가능성의 섬광으로 이해했다. 이들에게 순간은 사색의 대상이기보다 정치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단절은 종말이 아닌 결단의 시간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유를 찾을 수 있다. 유신체제에 온몸으로 맞섰던 시인 김지하는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빌려 ‘단(斷)’의 철학을 말했다. 더는 이대로 갈 수 없는 순간, 과감한 단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 단절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이었다. 어제·오늘·내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가능성을 여는 결단의 순간을 의미했다.
정치에서 순간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우연에 맡기지 않으며,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시간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 되고, 그 결과 역시 책임으로 돌아온다. 새해의 자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끊고, 무엇을 이어갈 것인가. 단과 부단(不斷)의 갈림길에서, 새해는 다시 그렇게 시작된다.
위기는 정치적으로 첨예해진 시간대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전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제 이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미룰 것인가, 어떻게 이를 이용할 것인지를 묻는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2024년 12월3일 자정 시민이 국회의사당에서 친위 쿠데타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판결 이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어도 의사당과 재판정에서 종종 보여주는 볼썽사나운 촌극은 위에 말한 정치적 결단의 순간을 희화하고도 충분히 남는다. 각종 매체를 통해 반복되고 넘쳐나는 가짜뉴스를 포함한 함량 미달의 정치논평은 순간이 주었던 충격과 자극을 계속 무디게 만든다. 이 결과는 변화나 혁신에 대한 갈망 대신에 영혼 없는 정치공학적인 셈법에 따른 결정만 남게 된다.
물론 이 같은 문제는 한국 사회만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제도 안에서 굳어진 정치로부터 소외된 계층의 분노에서 활력을 얻은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지구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비록 미미하지만,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는 한국 아스팔트 보수의 등장도 이런 현상의 하나다.
새해 벽두부터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식 우파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을 다시 한번 목격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현직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군사작전을 통해 체포해 미국 법정에 세우고, ‘안정적 정권 수립’까지 베네수엘라를 관리하겠다는 구상을 공공연히 밝혔다. 국제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이 발언은 단순한 외교적 돌출행동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정치가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즉각 갈라졌다. 마두로 제거를 ‘민주주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 트럼프의 불법성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도 사태 확산을 우려하는 신중한 입장도 적지 않다. 반대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떠한 명분으로도 주권국가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 대립은 다극화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개입’과 ‘자결’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다시 전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율의 공백은 타율로 채워져
마두로를 ‘마약 테러리즘’의 책임자로 규정하는 트럼프의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주요 마약 경로와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는 정치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다. 오히려 베네수엘라가 세계 최대 수준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차베스 정권 이래 자원 국유화를 통해 서방 자본과 충돌해왔다는 사실이 이 사태의 구조적 배경을 설명한다. 제재와 투자 단절, 기술 공백 속에서 사회적 기반이 붕괴하고 중산층이 이탈한 과정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베네수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대국이 자국의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즉흥적 결단이 국제질서의 규범을 대체할 때, 우리가 말하는 순간은 더 이상 해방의 계기가 아니라 폭력의 명분으로 전락한다. 문제는 누가 그 순간을 정의하고, 누가 그 대가를 치르는가이다.
한반도도 지금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분단, 핵, 동맹, 제재, 안보라는 언어들은 오랫동안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를 오래도록 침묵하게 해왔다. 그러나 불가피성을 내세우는 모든 질서는 이미 민주주의 외부에 있다. 민주주의는 필연을 받아들이는 체제가 아니라, 필연처럼 보이는 것을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는 용기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즉흥적 결단과 포퓰리즘적 힘의 과시로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때 가장 위험한 것은 외부의 개입 그 자체가 아니라 내부에서 질문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대신 결정할 것이다. 자율의 공백은 언제나 타율로 채워진다.
한반도에 결단의 순간이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는 도식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이 체제, 이 분단, 이 긴장은 과연 우리의 의지인가’라는 질문을 공적으로 제기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결단은 단절이지만 동시에 창조다.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질서와 결별하는 동시에,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가능성을 여는 행위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상상해야 하는 위험한 자유다. 한반도의 미래 역시 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물음이 새해를 맞는 정담의 첫자리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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