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베네수엘라 공습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가 체포된 뒤 4일(현지시각) 베네수엘라 카티아 라 마르의 파손된 건물 밖에서 두 여성이 내부의 잔해를 살펴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카티아 라 마르/로이터 연합뉴스 |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2026년 1월3일 새벽,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그의 부인을 미국 본토로 끌고 갔고, ‘정권 이양 때까지 베네수엘라 정부를 직접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수행하도록 결정했으며,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대통령은 마두로 대통령’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사태의 향후 전개 양상은 베네수엘라 정부와 국민의 저항 정도,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응, 미국 의회의 대응과 미국 국민의 여론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2026년 1월3일 이전과 전혀 다른 국제질서 시대의 문을 열어버렸다는 점이다.
이제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러시아 정부에 대해 비난하거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을 중재할 국제적 명분을 잃었다. 앞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 다른 국가들에 대해 물리적 위협을 가하더라도, 미국은 이를 견제하거나 중재할 소프트파워를 상실했다. 그런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중국을 견제할 명분은 사라졌다.
지금까지 미국이 온갖 국제 분쟁에 개입해 중재자 노릇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사회가 ‘미국이니까 그럴 명분이 있다’고 인정을 해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때때로 힘을 사용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더라도, 유엔을 기반으로 한 세계 평화 질서 구축에 들였던 일련의 노력과 의지가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게 되었다.
이건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유엔 기반 질서가 사실상 작동 정지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이든 러시아든 중국이든, 있는 그대로의 힘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을 갖추도록 강제했던 국제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힘의 논리 앞에서 인류 공동 번영이나 상호 협력의 가치가 설 자리가 없었던 국제질서를 우리는 경험한 적이 있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최소한 2차 세계대전 이전 질서로의 회귀이거나 더 위험한 세계의 출발을 공식화했다.
유엔은 주권 국가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면서 집단안보 체제로 세계 평화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원리에 기반한 국제질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이런 원리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구현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이 사실상 국제질서 운영자로 존재하면서 진영 내 갈등을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협력으로 관리했던 냉전체제가 과연 유엔이라는 국제질서로 포장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적은 전쟁과 살상, 더 많은 풍요와 협력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데이터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유엔 체제가 전제하는 주권 국가의 자기 결정권이란 그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든 전체주의 체제든 체제 결정권은 그 나라 국민이 갖는다는 의미다. 베네수엘라가 자국산 석유를 누구에게 팔든 역시 그 결정은 베네수엘라 정부와 기업, 국민이 결정할 문제라는 의미다. 설령 베네수엘라의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였다 하더라도, 그 문제의 해결권은 그 나라 국민에게 있다는 의미다. 패권 국가가 특정 국가의 정부를 운영해주고 자원을 배분해주고 정치마저 디자인해주는 그런 체제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전쟁과 살상, 궁핍과 고통을 가져왔는지를 2차 세계대전으로 처절하게 깨닫고 나서 만들어진 체제가 유엔 기반 질서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국제질서는 어떤 이유로든 패권 국가에 ‘찍히면 죽는’ 체제였다. 국제법도, 명분도 필요 없는 힘의 논리 앞에서 이유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왜 베네수엘라를 침공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이유로든 패권 국가가 공격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를 제어할 수단이 사실상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건 이제 대한민국 정치공동체의 생존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차원이 다른 고차방정식의 정치와 외교, 국방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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