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란집’에서 쫓겨난 45명(그해 11월 8명 재입주) 가운데 퇴거 후 5년 시점까지 거주하고 있던 주민은 단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인 김윤창(가명)씨가 2020년 5월22일 밤에 건물 계단을 오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
(가난의경로 10년 ②무연고 처리되는 사망자들에서 이어집니다)
그들은 생도 사도 ‘불명’이었다.
“아닙니다.”
안장선(가명)의 휴대전화 번호로 연락(2025년 10월30일)했을 때 응답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2015년 2월 ‘노란집’(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쪽방 건물) 주민 45명이 ‘일괄 강제퇴거’에 몰렸을 때 104호 안장선도 건물 앞을 막고 철거반원들과 대치했다. 스프레이로 쓴 벽글씨 “결사반대”가 그와 주민들 등 뒤에서 절박한 결의를 다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 방 빼라(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을 위해 건물주가 ‘40일 안에 전원 퇴거’ 통보)는 딱지 붙고 나서부터 한달 넘게 잠을 못 잤어요. 짜증만 나고 불안해서 돌아버리겠어.”(그해 3월 인터뷰)
철거반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주민들은 밤낮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신 망가질까 봐 수면제도 먹지 않고 버티던” 안장선의 고향은 용산구 청파동이었다.
15살에 집을 나온 그는 “타이어 빵꾸 때우는 일을 하다 귀를 다쳐” 청력이 크게 상했고, 25살엔 “인형 공장에서 프레스에 눌려” 엄지손가락을 잃었다. “공사장에서 공구리 치다가 무릎이 절단 나서” 병원에 실려 갔다. 더 이상 노동을 사주는 곳이 없어 노숙하며 떠돌던 그는 결국 고향 근처 동자동 쪽방으로 돌아왔다. 건물주의 단전·단수와 철거 강행으로 주민들이 한명씩 방을 뺄 때 안장선도 노란집(104호)에서 2m 떨어진 옆 건물로 짐을 옮겼다.
종잡을 수 없는 ‘안녕’
그가 2016년 3월 강서구의 영구임대아파트로 재이사했다. “시끄러운” 동자동을 벗어나 “혼자 조용히” 살길 원했다. 한달 수급비 48만원(2015년 기준)에서 방값 15만원 내고 남은 돈을 “독하게 아껴” 200만원 넘는 보증금을 모았다.
“이름이 없네요.”
당시 그가 사용했던 전화번호 저편에 그의 흔적은 없었다. 전화를 받은 남성은 “안장선님 이름은 안 적혀 있다”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무슨 뜻인가요?) “직원 연락망에 있나 확인했는데 없네요.” (회사 공용 전화로 쓰시는 중인가요?) “개인 전화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번호를 이전받으신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전화했을 땐 “이 번호를 쓴 지 5년도 더 됐다”며 말이 바뀌었다.
그의 안녕(생존 시 73)을 종잡을 수 없어 찾아간 아파트에서도 그의 현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거주는 물론 생존 여부(2025년 11월6일 관리사무소 “개인정보라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도 추정할 길이 없었다. 방 크기 26.37㎡의 아파트였다. 단지 내 공원 주위로 여성 노인들이 야윈 겨울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남성 몇명은 바닥에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가난의 풍경은 동자동과 겹쳤으나 풍경을 둘러싼 소리는 어긋났다. 칸막이가 제 기능을 못 해 ‘강제 소통’에 노출된 쪽방과 달리 벽으로 단단히 구획된 아파트에선 ‘각자 조용’했다.
“아니에요.”
안장선과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간 노란집 207호 이준길(가명)의 번호도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유치원 공용 폰이에요.”
안장선의 생사가 불명인 아파트에서 이준길은 6년을 살았다. 그가 2022년 8월 요양병원에서 사망해 한달 뒤 화장됐다는 사실이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명단에서 뒤늦게 확인됐다. 말수 적고 조용했던 그가 동자동을 조용히 떠났을 때처럼, 그의 조용한 죽음(당시 80)도 동자동에선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가난은 조용히 사라졌다.
“아닌데요.”
통화음은 311호 김윤창(가명·생존 시 66)에게도 닿지 않았다. 전화(2025년 11월27일)를 수신한 남자는 “모르는 이름”이라며 “두달 전부터 이 번호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벽 뚫린 3층 방 사이에 누워 퇴거를 거부했던 김윤창은 ‘돌발 사태’ 끝에 이사했다. 전기 끊긴 새벽에 철거 잔해에 걸려 넘어지며 머리를 다쳤다. ‘방 사수 의지’를 잃고 노란집에서 짐을 빼 10m 거리의 이웃 쪽방에 넣었다. 그해 11월 건물 공사(법원의 공사중지 가처분 인용 뒤 리모델링을 중단하고 쪽방으로 ‘땜질 복원’)가 마무리되자 노란집으로 ‘귀가’했다. 그는 재입주한 8명 가운데 사태 후 5년 시점(2020년)까지 노란집에 거주하던 단 두명 중 한명이었다. 젊은 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팔에 새긴 ‘용’ 자 문신 탓에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출소 뒤 “텔레비전에서 전두환만 보면 죽이고 싶은 생각”(2015년 3월 인터뷰)으로 몸이 저렸던 그는 ‘삼청 동창’(108호, 109호, 204호) 여러명이 노란집에 동거 중이란 사실은 몰랐다. “뼈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주민)된 그가 몇해 전 어느 병원으론가 실려갔다. 전화번호마저 ‘남의 것’이 된 두달 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미궁이었다.
12명이었다. 강제퇴거 사태 뒤 동자동에서 자취를 감췄거나 타 지역 이주 뒤 ‘생존 신호’가 잡히지 않는 주민이 전체의 3분의 1(26.6%)에 육박했다. 그들은 ‘수소문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기 유씨는 안 살아요.”
지하 7호 유경식(가명·생존 시 73)이 이사 간 건물(노란집에서 10m)에 그는 없었다. 그가 살던 방은 비어 있었고 주민 누구도 그를 알지 못했다. 유경식은 노란집에서 사망자가 나올 때마다 방을 치우고 죽음의 흔적을 닦았다. 수고비 대신 고인이 남긴 생활용품들을 가져와 손본 뒤 건물 앞 전봇대에 ‘매물’로 써 붙여 팔았다. 그에게 선풍기를 샀던 101호 고정국(가명·68)은 “그 사람 죽었다고 들었다”면서도 누구에게 들었는진 기억하지 못했다.
“상천이는 있어도 성천이는 없어.”
몸에 구더기가 슬도록 종일 누워 지냈던 302호 차성천(가명·생존 시 69)도 옮겨 간 방(노란집에서 2m)에서 행방이 깜깜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제발 죽고 싶다”던 그를 대각선 방에 사는 이웃은 몰랐다. “상천이도 차씨는 아니”었다.
“그 연세에 돌아가셨다고 봐야지.”
206호 백대진(가명·67)이 추리했다. 살아 있다면 93살이 됐을 ‘301호 발명가 할아버지’ 김대광(가명)도 생존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 없었다. “지구를 구할 무연료 발전기 ‘일렉트릭 볼케이노’의 시연식을 대대적으로 열겠다”(2015년 10월 인터뷰)고 벼르던 그는 노란집 공사가 끝날 즈음 갑자기 사라졌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11개 방 중 10개가 폐허인 2층에서 혼자 버티며 퇴거에 불응했던 203호 박수광(가명·생존 시 62)도 번호와 더불어 ‘없어졌다’.
‘노란집’ 강제퇴거 주민 안장선(가명)씨가 2016년 3월 이사 간 서울시 강서구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공동 텃밭. 2025년 11월6일 모습. 이문영 기자 |
애도할 수 있으려면
가난하고 고립된 존재들은 증발해도 인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생존과 소멸의 경계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무연고로 확정된 사망자(연고자를 찾을 수 없거나 연고자가 주검 인수를 거부한 고인)는 그나마 공영장례 기록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혼자 죽어 발견됐더라도 가족이 주검을 모셔간 경우는 ‘공고’되지 않았다. 지인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요양병원이나 시설에서 의식이 없을 때도 안위를 추적하지 못했다. “현재 무연고 사망(고독사 이후 장례 치를 사람이 없는 죽음) 행정은 빨리 화장해서 처리하는 데 초점을 두는 탓에 고독사와의 연속선상에서 예방적 정책 대응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박진옥 나눔과나눔 상임이사)도 있었다. 생사를 모르면 애도할 수도 없었다.
연어처럼 때마다 찾아오는가.
동자동 주민들은 ‘회귀 본능’을 기준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생존을 판단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도 꼭 찾아와. 한두번은 꼭 와. 안 오면 죽었다고 보면 돼.”(201호 박철관)
강서구 영구임대아파트로 옮겨간 안장선과 이준길은 이사 뒤 한번도 동자동을 찾지 않았다.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으로 ‘집단 이사’한 사람들(☞4회 ‘파편이 되어’)은 모두 살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는 동자동에 오지 않았다.
부고
기사가 출고된 날(1월6일) 오후 311호 김윤창(가명)님의 사망 소식과 장례 일정이 전해졌습니다.
김윤창님은 2025년 12월10일 경기도 김포의 요양병원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행정기관의 ‘가족 찾기’를 거쳐 1월9일 오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뒤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됐습니다. 향년 66.
고인은 “오리지널 서울(서대문구) 태생”(생전 인터뷰)이었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피해자였던 그는 삼청교육대 출소 뒤 종로구 창신동에서 봉제 기술자로 살았습니다. 미싱을 돌려 옷과 가방, 이불 등을 만들다 1997년 IMF 사태로 실직했습니다. 노숙하며 만난 이황수(가명·2018년 사망 당시 66)님이 ‘노란집’(지하4호)에 방을 얻도록 도왔습니다. 인왕산에서 굿당(무속인들이 정기 좋은 산에 차린 굿터) 일을 할 때 알게 된 동생을 자신의 쪽방에 들여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2015년 노란집에서 쫓겨난 고인은 그해 12월 재입주해 입원 당시(2022년)까지 2층 방에서 거주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10년을 채우자마자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노란집 퇴거 주민 45명 가운데 14명(31.1%)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쫓겨난 주민 3명 중 1명꼴로 세상에 없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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