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월5일 자 ‘황성신문’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정부에 의해 쓰시마로 압송된 최익현(崔益鉉)의 사망을 보도했다. 짧은 기사인지라 사망 일자도 원인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1907년 1월1일 74세로 별세하였다. 곧 그의 운구가 1월6일 부산항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집집마다 조기를 달고 일을 멈추었다. 부산항 상회소(商會所)에 빈소를 마련하였는데 각지에서 많은 조문객으로 붐볐다.
동래부 기생들도 한글로 만장(輓章)을 지어 올렸고, 범어사 승려들도 불교식 제례를 지낼 정도였다. 상인들도 기생들도 승려들도 평생 성리학에 몰입하여 살다간 그의 꼬장꼬장한 사상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터인데 무엇이 그들을 조문 자리로 이끌었을까?
이어서 1월14일 ‘황성신문’은 추모사에서 그가 국가를 위해 순국했다고 기리면서도 “그는 신사회와 싸운 것인가, 구사회와 싸운 것인가. 그가 처자를 위해 여기에 이른 것인가, 형제를 위해 여기에 이른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추모사는 “군자가 슬퍼하는 것은 그 뜻을 위한 것이니, 내가 어찌 최씨에 대해 배회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다와 하늘이 아득함에 돌아가는 구름에 의지하여 추모하노라”라고 맺었다. 으레 추모사라 하면 고인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도배가 될 텐데 이 추모사에서는 최익현 아니 위정척사파에 대한 복잡미묘한 심경을 담고 있다. 얼마 안 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미주 한인들도 그들과 생각이 한참 다른 최익현을 위해 추도회를 벌였다.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파는 시대의 발전을 가로막아 국망을 초래한 장본인인가 아니면 개화의 얼굴로 침략하는 외세를 막고자 노력한 자주의 상징인가?
동래부 기생들도 한글로 만장(輓章)을 지어 올렸고, 범어사 승려들도 불교식 제례를 지낼 정도였다. 상인들도 기생들도 승려들도 평생 성리학에 몰입하여 살다간 그의 꼬장꼬장한 사상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터인데 무엇이 그들을 조문 자리로 이끌었을까?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
그럼에도 이런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의 양이(攘夷) 의사(義士)와 유신(維新) 호걸 간 전쟁을 예로 들면서 그들의 노선이 각각 달라 다투었지만 국가를 위한 노력에서 일치하여 훗날 일본이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했음을 지적하곤 하였다. 또한 병자호란을 수습하고자 했던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이 결국 상대방의 충정과 노력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2004년 9월 서울대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학과 교수들 간의 친목 우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방학 중 시간을 맞추어 학과 교수들과 함께 충남 예산 대흥면과 광시면 등지를 돌아다녔다.
특히 예산은 어렵사리 안장된 최익현의 묘소와 함께 추사 김정희 고택, 고암 이응로와 정월 나혜석이 머물렀던 수덕여관, 윤봉길의 삶과 독립정신을 기리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보부상 박물관, 이정 박헌영이 다녔던 대흥보통학교 등 갈등과 비극의 씨앗을 담고 있는 19∼20세기 한국사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일정에 쫓기어 모두 들르지 못하였지만 대흥면사무소 앞에 설치된 ‘의좋은 형제 공원’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었다. 국민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형제 간의 정겨운 우애 일화를 읽으면서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가 의문을 품었는데 고려 말 조선 초 이순과 이성만 형제의 실화라는 사실에 필자의 냉소성을 탓하였다. 빡빡한 현실이다. 병오년 2026년 새해에는 붉은 말처럼 열심히 달리되 의좋은 형제같이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경쟁하는 한 해가 되길 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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