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계동 현대사옥, 창업주 정주영의 첫집무실이었던 방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권오갑 명예회장. 좌초 위기의 현대중공업을 되살려내 '구원투수'로 불린 권오갑 명예회장은 "무려 11년을 던지고 내려왔으니 최장 등판 기록을 세운 구원투수"라며 웃었다. /장련성 기자 |
판교 과수원집 막내아들은 훗날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다. 평사원으로 출발해 그룹 총사령탑이 됐고, 좌초 직전의 회사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사람’이 리더십의 요체였다. “일꾼을 내 가족처럼 먹이고 입혀 신명나게 일하게 하는 것이 주인에겐 가장 큰 득”이라던 아버지 가르침이 밑거름이었다. 엔지니어 위주 회사에서 비(非)서울대·비(非)이공계라는 약점은 공정한 인사, 포용의 경영을 추동한 원천이 됐다. 나락으로 치닫던 현대중공업을 세계 1위 종합중공업 기업으로 부활시킨 권오갑 HD현대 명예회장 얘기다.
‘정기선 체제’를 출범시킨 뒤 ‘평생의 꿈’이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다녀온 그를 서울 계동 현대 사옥에서 만났다. 하루 6~7시간 걸어 4200m 고지까지 올랐다는 75세 노장이 “내 허벅지가 이만기 못지 않더라”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 ‘사람’으로 승부한 ‘47년 현대맨’
-오너 일가가 아닌데 그룹 ‘명예회장’ 직에 오른 것이 재계의 화제였다.
“월급쟁이인 내가 명예회장이 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젊은 직원들과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히말라야엔 왜 가셨나?
“나는 어릴 적 뛰놀던 청계산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들어가니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이 제일 높다고 하더라(웃음). 늘 동경해오다가 이제야 소망을 이뤘다.”
-일선에서 물러나고도 새벽 6시면 판교 사옥으로 출근한다던데.
“아침을 먹기 위해 직원들과 식판을 들고 줄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대여섯 살때부터 아버지의 과수원 일을 도우면서 일꾼 아저씨들과 함께 일하고 밥을 먹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따로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걸 그때 배웠다.”
-대리부터 명예회장까지 47년간 14번 진급했더라.
“늘 부족하다고 느껴서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해야 했다.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그래도 될까말까였다(웃음). 엔지니어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상사가 일을 시키면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고 했지, 답이 없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서울대 조선공학과가 업계를 지배하던 시절, 비서울대·비이공계 출신으로 요직을 두루 거친 비결인가?
“졸업 후 첫 직장이 당시 젊은이들이 최고로 꼽던 회사였다. 그런데 특정 고교, 특정 대학 인맥이 주가 되어 의사 결정을 하더라.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퇴사하고 현대중공업에 지원했다. ‘정주영의 현대’는 오로지 일 잘하는 사람을 진급시킨다고 해서. 결국 현대로 왔기 때문에 오늘의 권오갑이 있었다.”
-권오갑은 ‘사람 경영’의 달인으로도 불린다.
“아랫 사람을 ‘부린다’ ‘데리고 일한다’고 말하는 순간 회사는 망한다. 나는 나이 어린 직원도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지로 존중하며 소통했다. 특히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칭찬을 받으면 새벽 3시에 깨어 회사에 가고 싶어지니까. 내가 회사를 지켜야 할 것 같고. 내가 딱 그랬다(웃음).”
-‘나보다 회사가 우선이다’가 철칙이었다고.
“젊은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지금도 내 삶의 우선순위는 첫째가 국가, 둘째가 회사, 셋째가 가족이다. 젊은날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는데, 지금도 집과 사무실에 해병대 전투복을 비치해뒀다. 언제든 전장에 나갈 태세로!”
-가까이서 본 정주영은 어떤 기업인이었나.
“처음엔 불도저처럼 거칠고 화도 많이 내는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매우 용의주도한 경영자더라. 회의를 한번 해도 현장에 미리 다녀오고 여러 의견을 물어 복안까지 마련해 들어오셨다. ‘불가능하다’고 보고하는 임원들에게 ‘이봐, 해봤어?’ 꾸짖었다는 일화가 거기서 왔다. 현대맨으로서 나의 47년은 정주영 철학을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권오갑 HD현대 명예회장이 집과 사무실에 각각 한벌씩 비치해둔 해병대 전투복과 군화. 해병대 장교 출신인 그는 "나라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권오갑 명예회장 제공 |
◇ 일생에 가장 무거운 시간
-경영자로서 첫 시험대는 HD현대오일뱅크 초대 사장으로 임명됐을 때였다.
“정유에 문외한이었지만, 24시간 휴대폰을 열어놓고 임직원들과 소통하면서 의사 결정 과정과 속도부터 단축해나갔다. 정제 마진에만 의존해서는 지속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해 비정유 부문을 키우며 구조를 혁신했다.”
-취임식 대신 현장에 나가 일일 주유원으로 일했다던데.
“경영의 본질은 신뢰와 소통이다. 일주일에 두 번 공장에 내려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1년에 한번 ‘추억의 노란색 월급봉투’를 지급했다더라.
“월급이 온라인으로만 들어가면 직접 만져볼 기회가 없으니까(웃음). 땀 흘려 일한 대가를 손에 쥐어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HD현대오일뱅크를 업계 1위로 만든 뒤 2014년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발탁됐다. 조선업 최대 불황으로 수조원대 적자를 내던 상황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일생에 가장 무거운 시간이었다. 영업 손실만 5조 원에 공사 부실 문제까지 겹치면서 사실상 망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창업주가 일군 기업을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일념, 중국에 조선을 내줄 수 없다는 각오로 뛰어들었던 것 같다.”
-노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던데.
“울산에 내려가니 ‘주인보다 100배 독한 놈이 왔다’는 플래카드가 붙었더라(웃음). 그러나 나는 노조를 적대 관계로 보거나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등한 관계로 서로 설득하고 양보하며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장인 나부터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노조원은 감원 대상에 넣지 않았고, 책임져야 할 임원들을 시작으로 터무니없이 비대해진 조직을 축소해 나갔다.”
-비 오는 출근길, 직원들 손을 잡으며 ‘힘 합쳐 회사를 살려보자’고 읍소한 사진이 화제였다.
“나는 좋은 사람과 기술만 있으면 회사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불황에도 신입사원을 뽑으며 세대 교체와 인력 재편을 추진한 이유다. 언젠가는 조선 시황이 호황으로 돌아설 것이고, 그때는 인재를 많이 확보한 회사가 가장 먼저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2014년 좌초 위기의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임명돼 비오는 출근길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힘 합쳐 회사를 살려보자"고 호소하는 권오갑 명예회장. /HD현대 제공 |
◇ 뼈 깎는 혁신으로 20배 성장
-특히 R&D에 매진했다더라.
“내가 가장 잘한 일이 판교에 GRC(Global R&D Center)를 만든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서울로, 해외로 빠져나가는 걸 막아야 했다. 덕분에 한국조선해양, 현대중공업 등 계열사들을 엔지니어링 회사로 빠르게 전환해갈 수 있었다.”
-현대중공업을 6개 회사로 분할한 것도 혁신의 차원인가?
“현대중공업 안에 열 개 넘는 회사가 있었다. 조선업이 잘될 땐 괜찮았지만 조선업이 무너지니 함께 무너지더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뼈를 깎는 혁신을 했다. 10년 전 7조였던 시총이 160조를 돌파했다.”
-현대오일뱅크에 이어 현대중공업까지 위기에 빠진 기업을 회생시켜 ‘구원투수’라는 별명이 붙었더라.
“야구에서 구원투수는 보통 1~2회만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던데, 나는 무려 11년을 던지고 내려왔으니 최장 등판 기록을 세운 구원투수가 됐다(웃음).”
-트럼프의 ‘마스가’로 조선업은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맞았다.
“마스가로 한국 조선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맞지만, 일이 본격적으로 오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경쟁사 한화는 필리조선소 건조 등 공격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업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이 다르다. 업계 1위인 우리는 정치적 이슈나 단기적 분위기에 기대기보다, 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존중하면서 지속 가능한 일을 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조선업은 연관 산업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인수보다 협업을 택한 이유다.”
-중국의 위협은 얼마나 심각한가?
“벌크선 같은 일반 상선 분야는 이미 중국으로 넘어갔다. LNG선, LPG선 등 가스선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그 격차도 5~10% 수준으로 줄었다. 이는 한국 조선업의 향후 진로를 결정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우리는 베트남·필리핀 등 해외 거점을 활용해 대응하고 있는데, 제조업 경쟁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정기선 체제'를 출범시킨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권오갑 명예회장이 지난달 평생의 꿈이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봉에 올랐다. 박영석 대장의 추모비가 보인다. /HD현대 제공 |
◇ 인내의 量이 직급을 결정한다
-집안 경조사를 비서도 몰랐다고 하더라. 상을 당해도 (현대) 아산병원엔 빈소를 마련하지 않았다던데.
“부장 시절, 그룹의 한 CEO가 딸 결혼식을 치렀다. 식장에 가니 축의금 내겠다고 늘어선 줄이 500m에 이르더라. 직원들까지 동원해 축의금 받는 모습을 보고 다짐했다. 내가 사장이 되면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절대 회사엔 알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정말로 사장이 돼버렸으니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나(웃음).”
-HD현대오일뱅크 사장 시절엔 대기업 최초로 임직원 월급의 1%를 재원으로 ‘1% 나눔재단’을 설립해 화제가 됐다.
“나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우리 사회가 지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원래는 30대 대기업 임직원이 모두 참여하는 ‘대한민국 1% 나눔재단’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 했다. 지금은 ‘HD현대 1% 나눔재단’으로 규모를 키워 매년 약 100억원을 우리 사회 취약 계층을 돕는 데 쓰고 있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등 창업자가 대부분인 ‘대한민국 기업 명예의 전당’에 전문경영인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47년 월급쟁이 인생에서 가장 영예로운 순간이었다. 대주주인 정몽준 이사장께서 나를 믿고 선택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너와 생각이 다를 때도 있었을텐데.
“회사에 꼭 필요하다는 확신, 그래서 설득해야 한다고 믿으면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정면돌파했다(웃음).”
-정기선 체제를 출범시킨 뒤 용퇴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필요하면 저한테서도 장점만 골라 본받으시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경영자의 자질에 겸손이 60%라고 생각하는데 정 회장은 소탈하고 격의 없는 성품이라 경영도 잘할 것이다. 기능공들과 잔디밭에 둘러앉아 막걸리 마시며 노래하던 할아버지 DNA가 손자에게도 있을 것이다.”
-샐러리맨의 또다른 신화였던 이명박 대통령처럼 정치에 뜻을 둔 적은 없는지.
“제안은 받았지만 고사했다. 상대를 공격하고 헐뜯는 정치는 나와 맞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싫었다(웃음).”
-마라톤을 네 번 완주했더라.
“체력이 있어야 기업을 경영할 수 있다.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도 2회 완주했다. ‘맞고 들어오지 말라’던 아버지 때문에 권투와 태권도를 배웠는데, 지금도 방에 걸린 샌드백을 하루 이삼백번씩 친다.”
-히말라야 설원을 보며 무슨 생각 하셨나?
“모두에게 고맙다는 생각. 많은 분들에게 신세를 져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일중독 남편이라 잔소리도 많이 들으셨을 듯한데.
“술 좀 적게 마시라는 소리(웃음).”
-30대의 권오갑으로 돌아간다면?
“100% 내 사업을 했을 것이다.”
-샐러리맨 생활이 힘드셨나 보다.
“신입 사원들이 SKY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회장이 됐냐고 묻는데, ‘누가 인내를 많이 했느냐가 그 사람의 직급을 결정한다’고 말해준다. 성철 스님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죽으면 사리가 많이 나올 것이다, 하하하!”
지난달 'HD현대 1% 나눔재단'의 아너상 시상식에서 장애가 있는 수상자에게 무릎을 꿇고 상패를 전달하고 있는 권오갑 명예회장(왼쪽). /HD현대 제공 |
☞권오갑
1951년 경기도 성남 출생. 한국외대 포르투갈어과를 졸업했다. 1978년 현대중공업에 입사, 현대오일뱅크 사장, 현대중공업 부회장을 거쳐 HD현대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다. 2021년 ‘대한민국 기업 명예의 전당’에 전문경영인으로는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HD현대 1% 나눔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과 현대학원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2024년 모교인 한국외대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윤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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