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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건강중심 사회에서 돌봄중심 사회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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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해 인사로 “건강하세요” 같은 덕담을 주고받는다. 건강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건강은 삶의 조건을 넘어 성취해야 할 목표이자 도덕적 기준이 됐다. 불건강은 개인의 잘못이며 고통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 결과로 취급된다.

작가 조한진희는 이러한 사회를 ‘건강중심사회’라 부르며 비판한다. 이 사회에서 건강은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간주되고, 아픔은 게으름이나 실패의 결과처럼 오해된다. 피곤하다고 하면 “운동을 해봐”라는 말이 돌아오고, 우울하다 하면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병이 생기면 “관리 좀 하지 그랬어”라는 뒷말이 따른다. 이 말들은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이면에는 아픈 이를 고립시키는 시선이 놓여 있다.

우리는 회사, 학교, 일상에서 ‘아프지 않은 존재’로 살기를 요구받는다. 아프지 않음은 성실함, 강인함의 증거가 되고, 반대로 고통은 미숙함, 책임감 부족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고통이 정말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현실에서 고통은 사회 구조와 긴밀히 얽혀 있다. 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망가지는 이들, 불안정한 고용과 경제적 압박에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 돌봄 노동을 떠안으며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하는 이들. 이들의 고통을 ‘자기관리 실패’라는 단어로 단순화하는 것은 폭력이다. “관리 좀 하지 그랬어”를 다시 생각한다. 이 말은 고통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린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귀속시킨다면 사회와 공동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근래에 ‘저속노화’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다. 취지에 일부 공감하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전제 한 가지는 인정하고 싶다. ‘노력으로 노화를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노화 자체는 결국 진행한다’는 점이다. 노화는 생명체의 일과다. 특이한 예를 들자면 어떤 연구에서는 백발이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기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 것일까. 고통 자체인가, 아니면 고통의 흔적을 감추려는 사회적 압력인가. 우리 사회는 아픔을 숨길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고통은 은폐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항노화에 대한 과도한 강박은 우리가 결국 늙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내, 고통의 카테고리를 하나 추가한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에서 적게 가진 이에게 더 많이 배분해 불가피한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정의론을 제시했다. 정교한 이론이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로운 시민’은 자율적 선택이 가능한 존재로 전제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율적일 수 없는 이들, 중증 장애인이나 침상 의존 환자는 어디에 놓이는가. 만약 이들이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 정의론은 돌봄이 필요한 몸들을 이론 바깥으로 밀어내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건강하고 독립적인 몸만을 사회의 기본값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병들고 늙어갈 수 있는 몸을 기본값으로 재설정할 것인가. 후자를 전제로 할 때 보편적 복지의 구조와 돌봄 정책의 상상력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돌봄이 필요한 자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돌봄과 상관없이 살던 이가 돌봄에 대한 고민을 겪게 되고, 돌보던 자가 돌봄받는 날이 온다. 그렇다면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은 생경한 구호가 아니라, 예고된 미래를 위한 준비다.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아프고 취약한 몸들을 사회의 중심에 둘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더 좋은 세상은 그러한 취약함을 전제로 시작되지 않을까.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형태와 방식이 보다 다양해져야겠으나 결국 ‘돌봄’인 까닭이다.


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의료인류학자

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의료인류학자

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의료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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