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로 8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박정민 [에스앤코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피아노 천재(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를 표현하기 위해 직접 연주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독립운동가 송몽규(영화 ‘동주’)를 헤아리기 위해 사비 150만원을 들여 중국 북간도 소재 그의 묘소로 간 여행, 무명의 래퍼가 되기 위해 가사를 쓰고 1년간 비트에 맞춰 랩을 했던 훈련(‘변산’).
그 어떤 것도 ‘쉬운 장면’은 없었다. 그때마다 박정민은 ‘진짜’가 되기 위해 자신을 쏟았다. 외적인 제스처에 머물지 않고 트랜스젠더 유이(‘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게서 소수자와 이방인, 가족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을 꺼내온 것도, ‘청룡’이라는 멜로 영화에서 전 남친을 연기한 것도 ‘진짜’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너른 바다 위에서 227일 동안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파이가 됐을 때, 배우 박정민 이름 뒤에 따라오는, 그 어떤 이력도 남지 않았다. 올해 ‘최고의 이벤트’였던 ‘국민 전 남친’의 흔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8년 만에 돌아온 무대는 두렵고 무서운 곳이었지만, 그는 하루하루 ‘무대 공포증’을 이겨내는 방법을 다시 무대에서 찾는다.
그의 무대 복귀작은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3월 2일까지, GS아트센터)다. 장르를 규정할 수 없다며 제작사에선 ‘라이브 온 스테이지’로 명명했고, 티켓 예매처에선 뮤지컬로 분류했지만, 엄연히 ‘노래 한 마디’ 부르지 않는 연극이다. 맨부커상을 받은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사랑받은 이 작품은 배우 박정민의 출연작으로 개막 전부터 엄청난 화제였다. 이미 지난 크리스마스에 박정민을 ‘국민 전 남친’으로 만든 가수 화사도 다녀갔다.
최근 GS아트센터에서 만난 박정민은 “공연 출연 제의는 간간이 있었지만 겁이 났다”고 했다. 소속사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고민은 깊었다. 박정민의 마음에 불을 지핀 사람은 같은 소속사의 선배 배우 황정민이었다. “‘그럼 하지마, 내가 할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이게 좋은 건가 싶었어요.” 공연을 보러 온 황정민은 “이보다 잘할 수 없으니 편하게 하라”며 용기를 줬다고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로 8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박정민 [에스앤코 제공] |
무대는 하루하루가 ‘첫 테이크’였다. 편집 없이 라이브로 서야 하는 무대는 배우에게 두려운 공간이다. 그는 “영화는 오케이 사인과 함께 연기가 박제되나, 공연은 5~6개월간 같은 장면을 다시 만들어야 하고 나의 실수를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 공포였다”고 했다. 하지만 ‘편집되지 않는 연기’를 견디는 과정은 박정민에게 무대 노하우를 하나씩 일러줬다. “‘빨리 잊는 것’이 무대 위 ‘생존 비법’이었고, 반복하는 연기를 통해 ‘좋은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배우로서 해볼 만한 경험”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아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표류하는 소년 파이와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227일간의 생존기를 그린다. 2021년 웨스트엔드, 2023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하며 각종 상을 휩쓸었다. 영국 최고 권위의 공연계 시상식이 로런스 올리비에상에선 5관왕, 미국 토니상에선 3관왕의 주인공이었다.
박정민은 “소설, 영화와 공연은 주인공의 회고 시점이 달라 감정의 크기도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소설과 영화에선 10대 소년 파이가 바다에서 겪은 일을 성인이 돼 풀어간다면, 공연은 사건 직후 살아남은 파이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공연의 무대는 때문에 파이가 구조 직후 머문 병원과 태평양 한복판을 오간다.
그는 “공연은 갓 살아 돌아온 소년이 얼마 전의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기에 혼란의 정도가 다르다”며 “소설은 더 정제돼 있고 세밀하고 섬세하게 설명했지만, 정서적으로 보면 공연의 텍스트가 가장 감정적”이라고 했다. 그에게도 “용기와 희망, 좌절 등이 조금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는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로 8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박정민 [에스앤코 제공] |
이 무대가 독특한 것은 상대역으로 사람이 아닌 퍼펫을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는 세 명의 퍼펫티어가 각각의 부위를 맡아 거대한 벵골 호랑이를 만든다. 파이를 연기하는 박정민을 두고 제작진은 ‘네 번째 퍼펫티어’라고 부른다. 박정민은 “처음 공연 영상을 본 뒤 가장 반한 부분은 동물의 움직임이었다”며 “세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모든 게 계산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연습을 시작한 초반 한 달은 ‘신체 훈련’ 기간이었다. 호랑이와 호흡을 맞추고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교류하는 법에 대해 훈련하며, 박정민도 네 번째 퍼펫티어가 됐다. 그는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관객은 리차드 파커를 대하는 파이를 통해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 무서움을 공유한다. 박정민은 “리차드 파커는 내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라며 “내가 파커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파이가 됐다고 느꼈다”고 했다.
무대에서 박정민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바로 ‘널뛰는 감정’이었다. 그는 “기쁨과 슬픔을 급격하게 오가고, 좌절했다가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 배우로서 어려운 점”이라고 했다. 사실 이 작품은 퍼펫의 존재가 워낙 강렬해 배우에겐 사람이 아닌 존재와의 연기, 이로 인한 ‘원맨쇼’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박정민은 그러나 공연 말미 한 장면이 자신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고 말한다. 화물선 침몰 사고를 조사하는 보험회사 직원이 파이의 이야기를 듣고 질책하는 장면이었다.
“‘네 이야기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날 조롱하고 멸시할 거고 비웃을 거니까 똑바로 말하라’고 하는데 그 말을 못 버티겠더라고요. 너무 잔인하게 들렸어요. 어렵사리 살아온 소년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 그 말을 못 듣겠더라고요. 이상한 마음이 들었어요.”
‘라이프 오브 파이’로 8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박정민 [에스앤코 제공] |
‘닮은 점’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파이’라는 소년을 만나 박정민은 온전히 파이가 됐다. “정반대의 아이기에 연습을 하면서도 두려웠다”는 그는 “파이의 생각을 따라가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나도 이런 것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누구라도 집어삼킬 듯한 검은 바다 위에 남겨진 박정민의 파이는 마주 선 현실을 슬기롭게 이겨내면서도 내면의 순수와 연약함이 생동하는 소년이다. 그는 “나의 파이는 좀 더 멘털이 약하고 감정에 휩쓸린다”며 “파이도 이 순간에 울고 싶겠다는 지점들을 채집하다 보니 감정의 진폭이 큰 파이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무대에 서며 박정민은 이전엔 미처 보지 못한 자기 모습도 본다. 그는 “눈물이 없는 편이라 ‘못 우는 배우’로 유명한데, ‘라이프 오브 파이’는 매 공연 감정이 주체가 안 될 만큼 눈물이 난다”며 “공연하면서 작품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다”며 웃었다.
파이는 지난한 표류기를 돌아보며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곤 어떤 것을 선택할지 묻는다. 박정민은 “이 공연은 삶에 관한 이야기”라며 “삶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그때그때 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무대는 그를 매일 같이 단련시키지만, 관객의 존재는 여전히 무섭다. 그럼에도 해를 바꿔가도 이어갈 긴 호흡의 공연이다. 박정민은 “지금은 공연이 끝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할 만큼 이 작품에 매여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새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웃음). 내년 계획? 없습니다.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웠는데, 이 공연이 제게 큰 용기를 줬어요. 예전처럼 ‘다신 안 해’라며 도망치진 않을 것 같아요. 전 여전히 무대 위에서 두렵고, 매일 깨지지만, 그래도 잘 자고 잘 먹으며 버티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