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오전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하며 활짝 웃고 있다. /뉴스1 |
며칠 먼저 나왔다면 ‘올해의 말’로 선정됐을 것이다. “김중배의 다이아” 발언이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발표가 나온 날, 송언석 국힘 원내대표는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탐나더냐는 대사가 생각난다”고 했다. 무척 통속적이지만 그간 이씨의 정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하게 들어맞는 구석이 있다. 줄곧 꽃길을 걷던 이씨는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선거에 4번 나가 4번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 장관 자리는 ‘김중배의 다이아’ 이상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국힘의 태도가 심순애를 대하는 이수일 같다. 신파소설 ‘장한몽’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대동강 부벽루’ 장면이다. 약혼녀 심순애와 김중배의 데이트 현장에 뛰어든 이수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심순애를 향해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다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자 뺨을 때리고 발길질까지 한다. 요즘 기준으로 데이트 폭력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국힘은 “일제 부역” “최악의 해당 행위” “협잡” 등 최고 수위의 비난을 퍼붓다가 당일 이씨를 제명했다.
국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윤리 측면에서 이 후보자는 배신자가 맞다. 그는 국힘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지역에서 3선을 했다. 임명 당일까지 서울 중심부의 국힘 당협위원장이었다. 이런 사람이 당과 형식적인 상의도 없이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장관 자릿값을 지불하겠다는 듯, 자신과 당의 과거를 부정하는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이런 사람일수록 독하게 충성한다. 그래서 이씨를 골랐다고 생각한다. 국힘 지도부만이 아니라 그동안 지도부를 비판하던 국힘 정치인들도 이씨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결국 국힘은 지금 대동강 부벽루의 이수일 처지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략적 수단이 아니라 통합을 위한 인사”라고 했다. 김중배가 이수일과 잘 지내려고 심순애를 유혹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통합 인사가 목적이었다면 보수 정권에서 일했던 유능한 관료나 재정 건전성과 작은 정부, 규제 혁파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를 택해야 했다. 정치인을 원했다면 지난 정권에서 거론된 몇몇 인사들처럼 적어도 현직은 아니어야 했다. 그랬다면 모두 박수를 쳤을 것이다. 정치 도의를 깨고 무슨 통합인가. 약한 고리를 뜯어내 국힘을 쪼개겠다는 낮은 수의 정략, 공직을 수단으로 상대를 공깃돌처럼 농락하는 권력 유희만 느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의 본질은 당하는 국힘이다. 얼마나 만만하면 저러겠는가. 지적 게으름에 빠진 탓인지, 특유의 엘리트 우월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당 전체가 패배주의에 물든 탓인지 지도부는 국힘이 어떤 당인지도 모르는 듯하다.
일본 자민당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보수 정당이라고 한다. 창당 후 70년 동안 정권을 내준 기간이 4년에 불과하다. 지금 자민당 내각 지지율은 76%, 18~29세 지지율은 92%로 경이적이다. 이 당의 가장 큰 자산은 ‘전후 부흥’이다.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주도 세력에 대한 신뢰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국힘의 역사적 자산은 이 자민당을 능가한다. 한국은 피식민지에서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다. 그 주도 세력이 한국의 보수이고, 정치적 중심에 국힘이 있다. 두 쪽이 나고 세 쪽이 나도 결국 국힘으로 뭉치는 것도 이런 레거시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정당이 돌아선 여친을 발길질이나 하는 못난이 신세로 전락했나.
국힘 지도부는 큰 착각을 하는 듯하다. 이런 뿌리 깊은 정당을 종교 단체가 급조한 아스팔트 신생 정당처럼 끌고 가고 있다. 이씨의 행태에 분노한 장동혁 국힘 대표는 “당성(黨性)이 최우선”이라고 했다고 한다. 조직 충성도를 말하는 듯하다. 당을 순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동강 부벽루에서 심순애를 향해 “몸을 더럽힌 X”라며 닦달하는 이수일 비슷하다. 김중배든, 이 대통령이든 그들의 분열 정략대로 다들 끌려가는 것이다.
누가 봐도 국힘의 살길은 이재명 정부의 실정과 폭정에 돌아서는 민심을 이삭 줍는 듯이 내 편으로 끌어모으는 방법뿐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각종 비리와 의혹, 사법부 장악과 헌정 파괴, 대통령 측근 문제 등 막강한 권력에 눌려 있는 문제들은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시간 문제일 뿐이다. 특정 지지층을 배제하지 않지만 포획되지도 않는, 이념이 아니라 계층·세대 간 이익 배분을 통해 지지층을 확대하는 자민당식 ‘포괄 정당’이 아니면 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많은 정치학자가 국힘이 아니라 ‘민주당의 자민당화(化)’ 가능성을 주목한다. 이 사실을 국힘은 무섭게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은 국힘에 그저 신파극이 아니다.
[선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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