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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이 대통령 방일, ‘과거사 의제’의 리부팅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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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공개된 새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드러난 미국의 대중 태도는 중국이 (대만 공격 같은) ‘금지선’만 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를 불필요하게 악화시키지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미·중 전략경쟁의 큰 틀엔 변화가 없지만, 중국을 ‘진정으로 상호 유익한 경제관계’로까지 묘사한 것을 보면 중국을 ‘가장 큰 도전’으로 규정하던 몇년간의 기조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내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은 이런 원칙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 내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예전과 달리 반응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대만 유사시’ 발언으로 촉발된 중·일 갈등이 두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으나 미국은 구두개입조차 꺼린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19일 “일본, 중국과 동시에 잘 지낼 수 있다”는 모호한 발언으로 일본 정부의 애를 태웠다. 트럼프는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 외교관이 다카이치를 ‘참수’하겠다고 위협한 사건이 제기되자 “중국보다 우리 동맹국들이 무역에서 우리를 더 이용했다”는 엉뚱한 답으로 피해갔다. 다카이치의 ‘대만 존립 사태’ 발언은 중국이 전함을 동원해 대만에 무력행사를 하고 이에 미군이 개입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일본 자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요건을 애매하게 얼버무려온 일본 정부의 관행을 깨고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해 설명한 것은 명백한 ‘외교 실책’이었다.

다카이치의 발언은 ‘중국과 잘 지내기로 한’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편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발언이 동아시아에 격랑을 일으킨 지 두 달 가까이 되는데도 미국이 ‘오불관언’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다. 동아시아에서 관전자에 가까운 ‘역외 균형(offshore balancing)’ 포지션을 취하려는 미국의 태도가 적용된 ‘시범 케이스’다. 일본의 고립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이런 태도가 유지되면 동아시아 외교 지형도 영향을 받게 된다. 한국, 일본의 자율성이 커지면서 갈등도 동반할 수 있다. 갈등이 역내를 넘어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미국은 개입하지 않거나, 갈등을 이용해 이익을 보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내년 1월 중 중국과 일본을 차례로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는다. 한·중·일 ‘외교게임’의 지형이 한국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정상외교다. 중·일 갈등으로 고립돼 있는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 악화를 원치 않을 것이고, 중국도 한국과 잘 지내야 할 이유가 많다. 학술 용어를 빌리면 한·중·일의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한국이 중추(pivot)의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이재명 정부가 대일 외교에서 보류해온 과거사 의제를 리부팅(rebooting)할 기회다. 과거사 갈등으로 한·일관계가 10년 이상 부침을 겪은 터라 쉽지 않은 과제이긴 하다. ‘보호주의 장벽을 타개하기 위해 한·일 협력이 중요한데 과거사를 다시 끄집어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일본이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와 연결되는 의제다. 일본은 그들이 바라는 ‘보통국가’가 된 이후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지에 대해 주변국에 명확한 그림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적극적 평화주의에 기반한 국제 협조주의’를 표방하지만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 흐름을 보면 미덥지 않다. 과거사 의제는 과거에 매달리자는 게 아니라 한·일관계의 미래를 묻는 작업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여야와 진보·보수를 아우른 전문가·언론의 의견을 수렴해 지난 22일 발간한 ‘대한민국 외교전략 컨센서스’도 “지속 가능한 한·일관계를 위해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고 한·일 간에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을 대일 외교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가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거사 문제의 첫 의제로는 조세이 탄광 수몰 노동자 등 강제동원 조선인 피해자의 유해 송환 사업이 적절해 보인다. 북한과 미국 같은 적성국 간에도 실시되는 ‘인도적 사업’조차 협력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미래를 신뢰하기 어렵다. 강경보수인 다카이치 총리를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지만, 이 대통령의 외교역량이라면 무난히 해낼 것이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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