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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설립된 중앙행정기관이다. 지난 77년간 검찰은 권력형 비리와 조직범죄 등 거악(巨惡) 척결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 처리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일부 정치검사들이 출세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고 부패 세력과 유착하거나 최고 권력을 탐하면서 급기야 검찰은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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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내리는 영욕의 '검찰청 77년'
장세정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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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현직 대통령 아들들
모두 구속하며 막강 영향력 과시
특수수사 인력·조직 키우면서
과도한 수사 경쟁으로 부메랑
특검 도입 빌미 제공해 자멸 촉발
정치에 밉보여 몰락, 청구서 올 것
검찰과 정치권의 불화와 갈등이 고조되더니 마침내 지난 9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1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2026년 10월 2일 검찰청은 해체되고 간판을 내릴 예정이다. 검찰청은 공소청과 중수충(중대범죄수사청)으로 분할되며 사실상 해체된다. 영욕으로 점철된 검찰청 77년 역사를 전직 법무부장관·검찰총장·중앙지검장·중수부장·민정수석 등 고위직 경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했다.
지난 9월 검찰청 폐지를 담은 정부조직개편안에 찬성 입장을 밝힌 정성호 법무장관과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 노 대행은 “모든 것은 검찰의 잘못에 기인한 것으로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① 한국 검찰의 뿌리=근대적 사법제도는 대한제국 시기인 1895년 3월 '재판소 구성법' 제정을 계기로 행정 조직에서 분리되면서 태동했다. 1907년 12월 '재판소 구성법' 개정에 따라 재판소(법원)에 검사국이 설치됐다. 일제시대 내내 검찰은 사법부의 일부였다. 1948년 8월 미군정이 과도기 입법으로 검찰청법을 제정하면서 검찰을 법원에서 분리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2월 새로운 검찰청법을 제정하면서 검찰의 독자적 조직과 체계를 법적으로 확립했다. 이 법에서 범죄 수사, 공소 제기 및 유지를 검사의 고유 업무로 명시했는데 2022년 검·경 수사권 조정 때까지 큰 틀이 유지됐다.
공안검사의 뿌리는 일제 '사상검사'
② 권총 차고 간첩 잡던 공안검사=공안검사의 뿌리는 일제시대에 고문과 조작으로 악명 높았던 사상검사다. 이승만 정부 시절 서울지검 정보부에서 활동한 오제도 검사는 '공안검사의 시초'로 불린다. 공산당 때려잡는 '타공(打共)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은 사상검사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권 침해 등 오 검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하지만 오 검사가 홍민표 남로당 서울시당위원장을 설득해 남로당원 33만명이 전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북한의 6·25 남침 당시 박헌영의 장담과는 달리 남로당 빨치산의 총궐기를 막은 것은 기억할 대목이다.
어음 사기 사건으로 구속된 1982년 당시 장영자 이철희 부부. 중앙포토 |
③ 군사정권 시절에도 소신 지킨 초대 중수부장=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 정권 시절에 경찰과 사법부는 물론 검찰도 크고 작은 인권 침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흑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때도 소신 있게 권력형 비리를 수사한 용기 있는 검사는 있었다. 덕수궁 옆 서울 서소문 청사 시절이던 1982년 이종남 초대 대검 중수부장은 '단군 이래 최대 어음(7100억원) 사기 사건'을 저지른 사채 시장의 큰손 장영자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 이철희 전 의원 부부를 1982년 구속했다.
정구영 검사장 "물고문 혐의 있다"
④ 민주화 시기 인권 지킴이 된 검찰=경찰 출신 전기환은 동생 전두환 대통령의 후광으로 경찰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검찰의 위세를 압도했던 5공 시절 경찰은 김근태 민청련 의장 전기고문, 권인숙 양 성고문을 자행했다. 급기야 1987년 1월 내무부 치안본부(경찰청 전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 군(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물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법조를 출입하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특종 보도로 세상에 알려져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박종철 고문 치사 은폐-축소 혐의로 구속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중앙포토 |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조사 중에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궤변을 늘어놔 인권을 무시하는 경찰 행태가 국민의 공분을 샀다. 경찰이 박 군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해 진실을 감추려던 것을 변사 지휘를 맡은 최환 검사(훗날 부산고검장)가 기지를 발휘해 화장을 늦춰 부검이 가능했다.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기자들에게 "물고문 혐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경찰의 고문 은폐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정 지검장에게 전화로 항의했던 강 본부장은 구속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은 인권 침해 원흉으로, 검찰은 인권 지킴이로 박수를 받았다. 군부 독재와 경찰 파쇼를 비판하던 86 운동권이 민주화 이후 화살을 검찰로 돌려 결국 검찰청 간판을 끌어내리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⑤ 검찰의 서초동 전성시대=1995년 검찰은 본격적인 서초동 시대를 연다. 대검의 서초동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지난 30년 서초동에서 검찰 조직은 영광의 순간과 치욕을 동시에 맛봤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이종찬 특별수사본부장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다. 검찰은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구속하고, '홍3 게이트'로 불린 홍일·홍업·홍걸 등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을 모두 사법처리했다. 두 현직 대통령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당시 이명재 검찰총장은 현직 대통령 아들이지만 공정하게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줄곧 주장했고, 수사를 마치자 물러나 '선비 검사'로 불린다.
1996년 법정에 선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
옷 로비 의혹 사건, 사상 첫 특검 등장
⑥ '특검' 도입의 빌미 제공한 검찰의 자충수=민주화 이후 욱일승천 기세이던 검찰은 옷 로비 의혹 사건(1999년)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1998년)을 계기로 존립 위기에 빠진다. 옷 로비 사건에는 김태정 검찰총장 부부가,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는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이 연루됐다. 검찰 자체 수사에서 의혹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자 국회가 입법으로 사상 처음 특별검사제도를 도입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김대업이 제기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은 당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못했다. 훗날 김대업은 허위 의혹으로 드러나 구속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야당 대선 후보에 불리한 수사를 했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옷 로비 의혹과 김대업 부실 수사 등을 계기로 검찰에 대한 불신은 여야 가리지 않고 비등했고 중수부(특수수사) 해체론이 불거졌다. 이런 흐름이 나중에 검찰 개혁론, 검찰 망국론, 검찰 해체론으로 이어졌다. 익명을 부탁한 전직 중수부장은 "특검이 도입되면서 검찰이 아니라도 수사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 검찰 조직에 치명타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옷 로비 의혹 특검에 출석한 1999년 당시 김태정 전 법무장관 부부. [연합뉴스] |
⑦ 너무 많이 가진 수사권, 검찰개혁 부메랑=2002년 10월 26일 서울지검 홍모 검사실에서 살인 사건 피의자 조모씨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 경찰에서나 있었던 고문치사 사건이 검찰에서 발생하자 검찰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 여파로 김정길 법무부 장관 등이 사퇴했다. 전직 서울지검장은 "특수부를 키우고 특수부 검사를 늘리면서 인지 수사 건수를 검사 평가와 인사에 반영하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지금 검찰청 간판까지 내리게 된 핵심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검찰이 경찰과 수사를 놓고 경쟁하지 말고 경찰 수사 과정이 법에 맞는지 인권 침해는 없는지 살피는 수사 지휘에 집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자성론을 폈다. 검찰 안팎에서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일가 비리 의혹 수사, 2017년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의 적폐 청산 수사, 최근 윤석열 정부의 대장동 의혹 수사와 김건희 비리 의혹 수사 등을 정치적 균형 감각이 부족했던 사례로 꼽는다.
2009년 4월 비리 의혹 수사를 받기 위해 대검에 출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변호인 문재인.[연합뉴스] |
심재륜 "칼 잘못 쓰면 검찰도 다쳐"
김현철과 한보 비리를 수사해 '특수수사의 전설'로 통하는 심재륜 전 중수부장은 후배 검사들에게 '수사십결(搜査十訣)'을 남겼다. 그 첫째가 '칼은 찌르되 비틀지는 마라'이고, 열 번째가 '칼엔 눈이 없다. 잘못 쓰면 자신도 다친다'였다. 후배 검사들이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새겼다면 검찰청이 간판을 내리는 치욕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⑧ 기억할만한 송종의 검사의 처신=직전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면서 윤석열 정부엔 '검찰 공화국'이란 부정적 꼬리표가 붙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을 발동하면서 검찰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77년 검찰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 검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범죄자를 감옥에 보낸 정의로운 검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송종의(84) 전 대검차장은 1990년 대검 강력부장 시절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었다. 1993년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엔 권력형 비리였던 '슬롯머신 사건'을 용단 있게 처리했다. 그는 대검차장과 법제처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전관예우를 거부하며 변호사도 개업하지 않고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밤 농사를 지어 사재를 기부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검찰의 자멸인지 정치의 타살인지는 역사적 부검이 필요할 것이다. 검찰청이 사라진 뒤 돈 있고 백 좋은 범죄자들만 살판 나는 '범죄 천국'이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검찰청 폐지라는 정치 실험에 따른 청구서가 조만간 한국 사회에 날아올 것이다. 범죄자는 웃고 피해자는 눈물 흘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23년 10월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한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씨가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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