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업무 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토교통부 업무 보고에서 “참 말이 길다. 가능하냐, 안 하냐 묻는데 왜 자꾸 옆으로 새나”라며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질책했다. /조선일보 DB |
이재명 대통령이 정부 부처 및 산하 유관·공공기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보여주는 직설적 화법과 화려한 언변이 연일 화제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의 참석자들을 쥐락펴락하는 광경은 본인 말마따나 “넷플릭스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낄 만한 측면도 있다. 좋게 보면 이는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다. 하지만 이달 초만 하더라도 딱히 그렇지만은 않았다.
12월 3일 외신기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북한에 억류 중인 한국 국민의 석방 관련 질문을 받고 “처음 듣는 얘기”라며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배석한 참모를 뒤돌아보며 확인까지 했는데, 결국 해당 기자로부터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놀랍다”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랬던 그가 열흘쯤 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의 ‘업무 파악 미비’를 공개적으로 질타한 것이다.
그 무렵,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특유의 투지도 약간 꺾인 듯했다. 무역의 날을 앞두고 열린 산업 역군 초청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은 산재 사망 사고가 감소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는 “(기업을) 압박도 해 보고, 겁도 줘 보고, 수사도 해 보고, 야단도 쳐 보고 하는데 대형 사업장은 줄어도 소형 사업장은 오히려 더 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그다음 발언이었다. ‘산재와의 전쟁’까지 선포했던 대통령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다.
비슷한 일은 그다음 날에도 있었다. 12월 5일 천안시에서 열린 ‘충남의 마음을 듣다’ 타운홀 미팅에서 그는 “요새 서울, 수도권 집값 때문에 욕을 많이 먹는 편인데 대책이 없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온갖 지혜를 짜내고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도 부동산 문제는 ‘구조적 요인’이라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구조적인 요인으로 수도권 쏠림 현상을 가리켰는데, 사실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해결책으로 제시한 지방의 광역 단위 통합 역시 별로 새로운 처방이 아니다.
대통령이라 해도 매사가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직 못 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비슷한 시점에 “대통령을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재임 반년쯤 된 이 대통령에게도 그런 증후가 무심코 드러난 것일까? 경위야 어떻든 대통령의 그런 고백 자체는 인간적이다. 하지만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는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어(禁忌語)가 아닐까 싶다.
정책이 난관에 빠질 때 정치인들이 잘 쓰는 말이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능력, 실수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나 규칙, 질서, 규범, 관행 등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다. 표면보다 이면에 주목해야 하고, 부분보다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취지로 원산지는 20세기 초중반 언어학·인류학·기호학 분야에서 풍미한 ‘구조주의’ 이론이다. 정치인들은 이 어려운 학술어를 종종 악용한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분산하고,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장기 과제로 ‘폭탄 돌리기’를 하기 위해서다.
무릇 대통령이란 구조적 문제와 정면 대결하는 자리다. 문제 정의가 난해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하며, 실험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하나를 풀면 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정책학에서는 이를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라 부르기도 한다. 국가 핵심기관의 장(長)을 오랫동안 근접 취재한 경험에 의하면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할까 말까’의 양자택일이다. 그런데 양쪽 선택지의 근거가 90 대 10인 문제는 사무관이, 80 대 20은 과장이, 70 대 30은 국장이 하며,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문제는 대개 50 대 50이다(황일도, ‘신동아’ 2006년 3월호). 그만큼 정답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일반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깨알 지시도 아니고 자기 정치도 아니다. 대신 국가적 차원의 구조적 난제를 끝내 해결해 내는 지도자의 역량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치열한 공부와 전문적 토론, 그리고 평생 쌓아온 철학과 신념, 지혜와 식견이다. 농지개혁, 한일국교정상화, 중화학공업투자 등 역대 대통령들의 백년대계는 그래서 가능했다. 대통령의 진정한 자신감은 화려한 TV 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국정과제 중 하나인 노동개혁이라도 제대로 성공시키는 모습에 조용히 묻어나는 것이 훨씬 대통령답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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