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1월, 소련은 완충지대 확보를 위해 조작된 핀란드의 국경 도발을 명분으로 핀란드를 침공했다. 이른바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핀란드는 압도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지형과 혹한이라는 자연적 조건을 활용해 강력하게 저항하며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국력 차이는 분명했고, 결국 일부 영토를 내주는 조건으로 종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소련이 언제든 재침공할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 핀란드는 독일군의 핀란드 영토 주둔 허용과 독일제 무기 구입 등 독일과 군사협력을 했다. 그러나 이는 동맹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핀란드는 독일의 이념이나 전쟁 목표를 공유하지 않았으며, 국제적 고립 속에서 독일은 어디까지나 소련이라는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선택지였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비행장과 도시를 폭격하자 핀란드는 소련의 선제공격을 명분으로 참전을 선언했고, 7월 초 공세를 개시했다. 겨울전쟁에 이은 ‘계속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총인구 대비 10%가 넘는 47만여명을 동원한 핀란드군은 겨울전쟁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카렐리야 지협에서 비푸리를 탈환하고 동카렐리야에서도 스비리강까지 진출하며, 겨울전쟁 이전 국경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핀란드는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지 않았다. 이는 핀란드의 의도적 계산이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핀란드는 더 이상 겨울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소련 침공에 가담한 공범으로 규정될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핀란드 지도부는 독일의 소련 굴복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핀란드를 면밀히 주시하던 미국과 영국은 핀란드의 전쟁 행보에 대해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핀란드가 소련에 대한 공세에 나서자, 미 국무장관은 핀란드 대사를 불러 독일과 동일시되는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핀란드는 이러한 신호를 정확히 읽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여할 의도가 없음을 미국에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전쟁에서 보여준 핀란드의 선택과 행동은 복수의 감정을 통제하고 냉정한 이성을 앞세운 생존 전략의 연속이었다. 이는 전쟁이 본질적으로 폭력의 확대와 심화로 치닫는다는 클라우제비츠의 통찰을,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절제하고 관리한 사례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때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는 사실 어려운 선택이다. 핀란드는 그 어려운 선택을 끝까지 실행했고, 그 결과 전쟁 이후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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